‘그냥 쉬었어요’ 비경제활동 청년들의 이야기 [공백기 인터뷰]

기사승인 2023-09-18 06: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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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쉬었어요’ 비경제활동 청년들의 이야기 [공백기 인터뷰]

삶의 어느 지점, 우리는 모두 공백기를 지난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거나, 일하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1개월 이상의 공백기는 용납되지 않는다. 공백을 경제 손실, 게으름과 무능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인식 속에서 공백기를 보내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불행하다. 그냥 쉬는 사람은 없다.

사단법인 니트생활자는 공백기를 보내는 청년들의 사회적 관계망을 만드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2019년부터 공백기를 보내는 20~30대 청년들을 1000명 이상 만나오며 공백기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각기 다른 이유로 공백기를 보내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할지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이번에 소개할 청년 빛새(31·가명)는 학교폭력 피해로 인해 오랜 시간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왔다. 그가 공백기를 보낸 과정,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려고 용기를 냈던 순간들, 인생의 전환점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글 쓰는 빛새라고 합니다. 대학원 가기 이전부터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했으니까 저의 공백기는 군대 다녀온 이후부터 4~5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공백기에 접어든 배경은 무엇인가요.

“고등학생 때부터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관련 학과로 대학 진학을 했는데 공부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더라고요. 압박이 좀 크게 느껴졌어요. PD에 대한 꿈을 접고 나니 졸업을 앞두고 고민이 더 커졌어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아무것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막막함 속에서 다음 진로는 어떻게 정했나요.

“대학을 졸업하면 주변의 압박이 있잖아요. 저는 사회에 나갈 자신이 없었어요. 왜냐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거든요. 내향적이라는 이유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포기한 것도 있었고, 일부러 피한 것도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더 나아가질 못하겠어서 대학원으로 도피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학교폭력을 당했어요. 고등학교 1~2학년까지 친구 없이 혼자서만 지내다 보니까 알게 모르게 괴롭힘을 자주 당했어요. 사람이 싫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대학교에 갔는데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상황이 더 많았어요. 대학원도 마찬가지였고요.

논문을 써야 하는 2학년 때 코로나19가 터졌어요. 사람들과 관계가 끊어져서 차라리 마음이 편했어요. 대학원생이 되어서도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방황하다가 독일 유학을 준비하기도 했는데, 목적이 없다 보니 1년 정도 준비하다가 포기했어요. 대학원을 중퇴하고 도망치면 부모님 뵐 면목이 없으니까 5개월 만에 논문을 써서 대학원을 마치고 그다음 스텝을 밟아보자 했죠.”

-사회로의 진입 과정은 어땠나요.

“학교를 10년이나 다녔잖아요. 2021년 2월에 졸업했을 때 세상 밖으로 나오면 다 될 줄 알았어요. 취직해야 하니까 150곳 입사지원서를 넣으면 한 3~4곳 정도 면접을 봐요. 마비가 올 정도로 긴장하고 가면 저를 대충 보고 끝났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죠. ‘회사에 들어가서 얻을 게 있을까?’ 여러 가지로 허무했어요. 1년을 그러고 나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고요.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022년에 구직을 포기했죠. 너무 힘들었어요.”

‘그냥 쉬었어요’ 비경제활동 청년들의 이야기 [공백기 인터뷰]
빛새를 형상화한 펜던트

-번아웃이 왔을 거 같아요.

“번아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기에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어요. 2021년부터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어요. ‘이런 세상에 살기 싫어요’라면서 찾아갔었죠. 그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기대도 내려놓고, 남 탓하던 생각들도 정리할 수 있게 됐어요. 3~4년 전의 나는 사람을 너무 싫어하고 실패와 허무주의에 절어 있었다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돌아보니까 저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은 있는데 실행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사람이 큰 사건 하나로 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잘한 실패가 쌓여 쓰러지는 경우도 있잖아요. 저는 10대 때 한번 꺾이고 난 후 작은 실패들이 누적되면서 자신감을 계속 잃어갔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30대가 되었고요.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심리치료를 받게 된 거죠. 앞으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며 자포자기하고 있었어요.”

-구직을 포기한 후 가진 공백기는 어떻게 보냈나요.

“자포자기하고 지내다가 우연히 니트컴퍼니라는 공백 기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알게 되었어요. 살고 있는 장소는 달라도 비슷한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거기서 안정감을 많이 느꼈어요.

1년 정도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처음에는 다이어리를 썼어요. 커뮤니티 안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늘어나다 보니 ‘이 정도는 해도 괜찮구나’하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뭐라도 쓰겠지’라는 작은 소모임을 열어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을 조금씩 넓혔어요. 이런 과정 자체가 저에게는 매우 큰 변화였어요.”

-다시 사회로 나아갈 힘은 어떻게 갖게 되었나요.

“저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었어요. 살아오는 내내 에너지를 많이 갉아먹는 사람이었어요. 예전에 아르바이트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2~3일 동안 엎드려서 잠만 잔 적도 있고, 면접 전날부터 너무 긴장해서 마비 증상 온 적도 있어요.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작은 일이라도 하면서 극복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이렇게 마음먹을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조금은 열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사람 싫어하고 혼자 있는 걸 지독하게 좋아했던 사람인데 스스럼없이 사람들에게 ‘잘 지내냐?’라고 인사하는 저 자신이 놀라웠어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가 저에게는 필요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나를 이렇게 좋게 봐줄 수도 있구나’, ‘긍정적인 사람으로도 인식될 수 있구나’라고 느낀 경험이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둘 수 있게 했어요. 많은 분의 응원 덕분에 공백기를 잘 보낼 수 있었죠.”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나요.

“구김살을 펴고 저를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놀림감이 되고, 부정당하면서 억눌렸던 시간이 워낙 길었기 때문에, 제 모습을 꾸며내려고 했던 적이 많아요.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솔직해질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 플랫폼에 반찬에 대한 주제로 7개월 정도 글을 썼어요. 반찬에 담겨있는 저의 이야기를 하며 나의 상황이나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내가 어떤 삶을 살았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천천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나에게 공백기란 어떤 의미일까요.

“‘영점 조정’의 시간인 것 같아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어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앞에 있던 장애물들을 치우고, 마음의 짐도 줄이는 과정을 겪었어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기 위한 영점 조정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니트생활자 admin@neetpeople.kr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