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없었다”던 유인촌…문화계는 우려만

기사승인 2023-10-12 06: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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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없었다”던 유인촌…문화계는 우려만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사진=임형택 기자

유인촌이 돌아왔다. 배우가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다. 2008~2011년 이명박 정부 초대 문체부 장관으로 지낸 지 12년 만이다. 유 장관은 지난 9일 문체부 장관으로 임명돼 국정감사로 임기를 시작했다. 문화예술계는 반쪽으로 갈렸다. 유 장관 인사청문회 직전까지 적극 지지와 지명 철회를 외치는 목소리가 나뉘었다. 문화자유행동 등 85개 단체는 “문체부 장관 재임 시 보여준 소신, 일관성, 강력한 추진력, 성과 등을 원숙한 경륜으로 펼칠 것을 기대한다”고 지지 성명을 냈다. 반면 진보성향 문화예술단체 128개 등이 모인 ‘유인촌 문체부 장관 지명 철회 촉구 문화예술인 공동행동’은 블랙리스트 의혹 등을 들어 후보 지명 철회를 요구했다.

“블랙리스트 판결도 있는데…재발 방지책 내야”

유 장관이 마주한 가장 큰 벽은 블랙리스트 의혹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문체부 장관을 지낸 그가 이른바 ‘좌파 예술인 찍어내기’에 앞장섰다는 게 골자다. 유 장관 임기 중(2008년 8월) 작성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에는 좌파 예술인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차단하고 이를 우파 예술인에게 배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2019년 펴낸 백서에도 유 장관 이름이 104번 거론됐다. 유 장관은 “블랙리스트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블랙리스트 관련 조사도 불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제 이야기를 104번씩 거론하면서 왜 저를 구속 안 했는지 궁금하다”며 “백서는 일방적으로 기록된 것”이라며 의혹에 선을 그었다.

유 장관의 입장과 달리 이미 블랙리스트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유 장관이 밴드 자우림 김윤아를 두고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경우 책임도 따르기 때문에 공개적 표현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발언한 게 대표적이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MBC 라디오에 출연해 “이런 발언을 정치권에서 하나하나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일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청한 음악계 관계자는 “정치인의 언행 한 마디가 특정 연예인 생사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정치인 또한 (발언에) 신중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일각에서는 유 장관이 앞선 청문회에서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화예술인이 아니”라고 발언한 것부터가 문제라고 봤다. 사회비판을 담은 예술을 부정하는 게 블랙리스트와 일맥상통하다는 지적이다. 블랙리스트로 인해 문화산업 전반이 위축됐던 과거가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토로도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영화계 관계자는 “팬데믹 이후 업계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상황에서 영화산업이 더 위축될까 걱정된다”고 했다. 정윤희 블랙리스트이후(준) 디렉터는 “MB 정부 당시 예술 검열 및 좌파·우파 예술인을 나눠 와해시키려던 정책 문건이 버젓이 존재한다”면서 “법원 판결까지 있었던 만큼 블랙리스트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문체부를 비롯한 정부는 검열과 관련해 재발 방지책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블랙리스트 없었다”던 유인촌…문화계는 우려만
발언 중인 유 장관. 사진=임형택 기자

쪼그라든 창작지원…“퇴보 우려”

예술 지원사업도 앞날이 위태해졌다. 문체부가 지난 8월 발표한 내년 예산안에 따르면 문화예술 예산은 올해 2조2704억원으로 올해보다 436억원 줄었다. 특히 영화계와 출판계 타격이 크다. 유 장관은 대통령 문화체육특보로 임명됐을 당시 “문화·예술도 경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을 확실하게 밀어줘야 한다”(조선일보)고 했다. 업계가 지원사업 축소를 우려하는 이유다.

정 디렉터는 “국감을 보면 유 장관은 극단적 실용주의에 입각해 이윤을 추구하는 예술, 특히 콘텐츠 분야 예술에만 집중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실제 윤석열 정부는 콘텐츠 업계 금융지원 예산은 1조7700억원 규모로 역대 최대로 편성한 반면, 창작지원사업 등의 예산은 삭감했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K팝도 사정은 좋지 않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해서다. 윤동환 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 회장은 “하위 30%는 최저시급 수준의 수입도 못 얻어 제작 자체를 못하는 상황”이라며 “제작 관련 지원이 필요하다. 지원자 또한 정치적 잣대나 관계에 따라 등락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 투명한 과정을 통해 선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 평론가는 “극단적으로 말해 지원사업 없이 자력으로만 창작 활동을 하라고 한다면 예술 분야 창작이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만큼 창작 수입을 통해서만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예술인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그는 “다양한 지원사업은 예술인이 더욱 실험적이고 새로운 창작을 시도할 근간이 된다”며 “지원 정책을 개선하겠다는 유 장관이 또렷한 정책적 비전을 가졌는지 아직 믿음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정 디렉터는 “(문체부가) 다양하고 창의적인 예술을 제대로 지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한국사회가 이룬 문화 발전과 시민들의 예술 향유가 퇴보할까 걱정스럽다”고 했다.

이은호 김예슬 기자 wild37@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