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은 감독 “고양이 눈으로 본 아파트, 어떤가요”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2-03-23 06: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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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감독 “고양이 눈으로 본 아파트, 어떤가요” [쿠키인터뷰]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속 고양이 반달이. (주)엣나인필름

가슴팍에 흰 반달무늬가 그려져 있어 ‘반달이’라고 불리던 검은 고양이는 서울 둔촌주공아파트 단지의 인기스타였다. 사람을 잘 따르는 성격 덕분이었다. 누군가 다가오면 냉큼 무릎 위에 올라앉았고, 등을 쓰다듬으면 ‘골골골’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아파트 재건축을 위한 철거가 시작되면서 반달이는 위험에 처했다. 매일 콘크리트가 무너지는 공사장에서 반달이는 무사한지 활동가들은 애를 태웠다.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쩌다 인기척이 나면 반달이는 냉큼 달려와 사람을 맞이하곤 했다.

최근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재은 감독이 들려준 반달이 근황은 이랬다. “지금은 잘 지내요. 좋은 집으로 입양도 갔고요.” 정 감독은 둔촌주공 주민들이 이사를 나가던 2017년 5월부터 2년 반 동안 단지를 드나들면서 이곳에 살던 길고양이 250여 마리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완성한 영화가 지난 17일 개봉된 ‘고양이들의 아파트’다. 작품을 본 관객들 사이에선 “지금 너무 필요한 영화”(가수 요조), “지구는 인간을 위한 것만이 아님을 나지막하게 말하는 영화”(배우 윤진서) 등 호평이 나온다.

정재은 감독 “고양이 눈으로 본 아파트, 어떤가요” [쿠키인터뷰]
정재은 감독. (주)엣나인필름/(주)메타플레이

정 감독이 둔촌주공 고양이들을 처음 만난 건 이 아파트 재건축이 승인된 2016년 9월의 일이다. “고양이들이 굉장히 행복해 보였어요. 자기들 영역에 몇 마리씩 모여서 놀고, 낮잠도 자고…. 주민들이 고양이들과 돈독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런 곳에 재건축이 시작되면 고양이들은 어떻게 될지 정 감독은 궁금했다. 마침 둔촌주공 고양이들을 안전한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둔촌냥이’ 프로젝트가 시작돼 정 감독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 촬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단지에 사는 고양이 수가 워낙 많아서였다.  “닥치는 대로 모든 고양이를 찍어두자”며 촬영하다 보니, 350시간 가까운 분량이 나왔다. 정 감독은 9시간짜리 첫 편집본을 줄이고 줄여 88분 분량으로 최종본을 완성했다.

영화 속 고양이들은 더없이 자유롭고 평화롭다. 고양이를 “삶의 주체”로 여기고 “고양이들의 독자적인 삶”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읽힌다. “동물의 고통을 전시하는 행위를 조심해야 한다고 봐요. 동물을 고통 받는 존재로만 묘사하면, 동물권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정 감독은 고양이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해석해 이야기화하는 대신, 음악과 영상으로 관객의 감각을 일깨운다. “질문하고 싶었어요. 재건축되는 아파트를 고양이들 눈으로 보면 어떨 것 같은지. 관객들 생각이 어디까지 뻗칠지 제가 알 순 없어요. 다만 쉽게 갈 수 없는 시공간을 영화로 경험하고 나면, (마음에) 다가오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재은 감독 “고양이 눈으로 본 아파트, 어떤가요” [쿠키인터뷰]
철거 직전 둔촌주공아파트. (주)엣나인필름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아파트다. 자산 증식 수단이자 계급 상승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아파트는 이 작품 안에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되찾는다. 정 감독은 주민 없이 텅 빈 아파트가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한다. “도시 한복판인데도 고요했어요. 바람 소리, 새 소리가 예민하게 들릴 정도로요. 사람과 자동차가 없는 빈 도시의 이미지가 제겐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파트 생태계’에서 아파트를 둘러싼 여러 요소를 탐구했던 정 감독은 “아파트 역시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깊이 관계 맺은 주체라고 생각한다”며 “아파트가 철거돼 사라지는 과정도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다가가길 바랐다”고 했다.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고양이와 아파트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과 연결돼 많은 질문거리를 던진다.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아파트는 정말 사람만의 공간일까, 지속 가능한 도시 계획은 무엇일까…. 정 감독은 말했다. “교훈을 주려고 만든 영화는 아니에요. 영화는 감각을 제공할 뿐이에요. 아파트가 사라지니까 기분이 어떤지, 식물이 뽑히는 장면은 어떤지, 고양이의 시점으로 본 도시는 어떤지.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가 느껴지고 궁금해지면, 거기서부터 논의가 시작될 수 있겠죠.”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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