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정책에 놀아난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

[근대뉴스] 사이토 마코토 군수강습회 훈시...조선 통치 정신 홍보하라
3대·5대 조선총독 역임하며 일본 총리까지 오른 조선 통치의 고단수

기사승인 2022-08-16 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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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15일

이달 전국 지방개량학습을 개최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고한다. 나는 부임 이래 천황의 뜻을 받들어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고 조선 신민의 복지를 증진하여 함께 발전하는 길을 열어왔다.

이에 따라 서민 정책을 개선할 뜻을 세우고 추진해 나가고자 하는 바이니 각 지방 군수들은 이를 숙지하기 바란다.

지금 전국 지방 관서가 추진하여온 행정제도에 보다 쇄신을 기하고자 각 지방 군수는 친히 신민을 접촉하여 각고의 노력으로 그릇된 시정을 고치고 총독부의 방침을 기반으로 민심의 추이를 감독하기 바란다.

특히 각 지방마다 실정에 맞는 탄력적 대응으로 본부의 시정 취지가 어긋나지 않도록 임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조선 신민의 복리를 위해 맹진하는 바, 이같은 군수 강습회를 열어 지방행정 시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총독부 정무총감과 각 부장들은 제반 집행 방법을 널리 알리길 바란다.

그래야만 조선 통치의 정신을 조선 신민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각 군수들은 복리증진의 목적을 잘 홍보하여 신민 각각에게 전달해 실적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출전 조선일보)

자유 정책에 놀아난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
일제 강점 기간 36년 중 10년을 조선총독으로 재임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 문화통치의 공로를 인정 받아 일본 총리에까지 오른다. 해군대장 출신으로 독직 사건으로 물러났다가 삼일운동 직후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해설] 1919년 9월 2일 조선총독부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1858~1936)가 부임했다. 강우규 의사는 경성역에 도착한 그에게 폭탄을 던져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목숨을 건진 사이토는 3·1만세운동에 드러난 조선인의 저항을 잠재우려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 선회를 했다.

그는 부임 이듬해 12월 7일 도쿄에서 열린 신문기자 초대 석상에서 “충분한 인내로 (조선에 대한) 문화정책을 실시하겠으며 그 일환으로 헌병 통치에서 경찰 통치로 바꾸는 등 근본적인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산업개발과 지방제도 개선, 보통학교 보급과 자혜의원 설립, 철도 육성 등의 정책을 발표했다.

그의 이같은 교활한 ‘문화정책’ 저변에는 또 다시 실패하면 안 되는 자신의 정치 위상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1912년 해군대장으로 승진했던 그는 1914년 일본 내각과 해군 수뇌부가 군수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독직사건으로 밀려났다가 5년 여 만에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그의 소위 문화통치에 휘말려 수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변절하였고 위장된 ‘조선자치론’에 독립운동의 방향은 혼선을 빚게 된다.

이러한 그의 역량(?)의 결과인지 3대 총독(1919~1927년)에 이어 5대 총독(1929~1931)을 역임하다 1932년 총독 사임 후 일본 총리가 된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