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시선]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전라도 천년사’

‘일본서기’ 주장 그대로 차용해 전라도 역사 심각히 폄하, 폐기 촉구
“충분한 토론과 고증으로 전라도인 기상 담은 역사서로 재탄생하길”

입력 2023-06-02 13: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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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시선]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전라도 천년사’
전라도 천년사 표지

쿠키뉴스 전북본부 데스크칼럼 <편집자 시선>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현안들에 대해 따끔하게 지적하고 격려할 것은 뜨겁게 격려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주변의 정치적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전라북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전라도 5천년 역사를 총망라한 사서인 ‘전라도 천년사’가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전라도 천년사’의 서술 내용이 일제 식민사관을 조장한다며 시민단체, 국회의원, 지방의회까지 나서 방대한 사료의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광주·전남·전북 국회의원들은 “식민사관에 근거한 역사서술을 바로잡고, 민족사관에 입각한 천년사를 정립하라”고 주장했고, 전남도의회는 “최근 공개된 ‘전라도 천년사’는 전남을 우롱하고 심각한 역사 오류와 왜곡이 있다”며 전면 폐기를 요구했다. 

전남도시장·군수협의회도 “검증되지 않은 ‘일본서기’와 같은 자료를 그대로 인용해 전라도민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전라도 천년사’를 즉각 폐기하라”고 주장했다.

동학학회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정읍시의원, 정읍지역 전북도의원 등도 “고부 농민봉기는 기존 민란과 달리 혁명을 목표로 전략적으로 기획한 역사적 사건인데 전라도 천년사는 ‘민군’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면서 “동학농민혁명 역사를 왜곡한 전라도 천년사를 당장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전문가들도 사서 일부에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任那)일본부’설의 근거로 쓰인 ‘일본서기’ 기술 내용을 차용해 ‘남원’을 임나지명인 ‘기문’으로, ‘장수’ 또는 ‘고령’을 임나지명인 ‘반파’로, ‘해남’을 임나지명인 ‘침미다례’로, ‘하동’을 임나지명인 ‘대사’라고 표기해 전라도 전 지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친일사관’ ‘식민사관’에다 ‘민족 반역’이라는 비난까지 나온다.
 
한 학자는 단군조선의 부인, 백제ㆍ가야편에 임나일본부설 도입, 중국 동북공정 옹호 등으로 고대사 왜곡뿐 아니라 ‘고려사’ 지리지에 고려의 북방 강역은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과 압록강 북쪽 600여리 철령으로 되어 있음에도 일본인들이 축소한 지도를 그대로 추종했으며 조선편에서는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계해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방적 관점으로 서술됐다고 지적했다. 

역사 왜곡 논란과는 별도로 완성된 책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맞춤법이 엉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1권 총설 몇 장만을 검토해보니 오·탈자 30여 개, 띄어쓰기 틀린 곳은 200군데가 넘는다며 낯 뜨거울 정도’라고 비판한다. 일부에서는 당초 전라도 1000년의 역사를 담으려던 책이 5000년사를 아우르기로 갑자기 계획을 변경한 것도 석연치 않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전라도 천년사’는 ‘전라도’라는 명칭이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에 정명(定名)되어 100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전개한 여러 사업 중의 하나로, 당시 전주가 호남의 가장 큰 도시임을 상징해 전북에서 편찬을 추진키로 했다. 이에 따라 전북도 출연기관인 전북연구원이 주관해 사업을 진행하였으나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며 영광보다는 빛이 바랬다. ‘전라도 천년사’는 2018년부터 5년간에 걸쳐 역사·문화·예술 각 분야의 전문가 213명이 참여해 모두 1만3559쪽 분량에 이르는 34권을 편찬한 대형 역사 기록 프로젝트다.  

‘전라도 천년사’가 ‘식민사관’ ‘친일사관’이라는 지적에 대해 ‘전북 남원을 기문, 장수를 반파, 전남 강진·해남을 침미다례라고 ‘일본서기’의 임나 4현 지명으로 설명한 부분에 대한 이의는 충분히 평가할 부분이 있으나 쟁점이 되고 있는 여러 사항들은 지역 간, 학자 간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에서는 어떤 문헌을 두고 인용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전라도 천년사’는 되레 식민사관에 관한 문제를 별도의 한 장으로 정리해 ‘일본서기’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민 정서에는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는 나라보다 민감한 부분이 많다. 특히 최근에 근대사에서 일본이 역사 왜곡 망언을 드러내 놓고 노골화하는 형태는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 충분하다. 물론 일제36년 등 근대사의 치욕으로 고대사를 재단해서는 안 되지만 학계에서조차 진위가 의심되고 있는 일본 역사서의 내용을 적극 차용하는 등 역사왜곡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심각한 재검토와 사회적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

역사의 기술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를 교육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역사는 민족의 앞날을 책임져 나갈 미래 세대들을 위해서라도 올바른 관점에 입각해 기술돼야 한다.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회는 충분한 의견 수렴을 위해 공람기간을 2개월 늘려 7월 9일까지로 연장하고 공개 학술토론회를 연다고 밝혔다. 공개토론회에서는 논란이 된 기술에 대해 논리적 비약과 식민사관으로서의 국민적 정서를 자극하기보다는 정당한 학문적 주장을 토대로 충분히 토론하고, 편찬위는 기왕 늦은 것 시간에 쫒기지 말고 왜곡된 부분은 과감히 수정해 제대로 된 역사서를 만들기 바란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지명 중 가장 오래된 지명이라는 ‘전라도’의 자존을 지키고 기상을 펼칠 수 있는 역사서로 다시 탄생하길 기대한다.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