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15)

고갱의 ‘죽은 자의 혼이 지켜본다’는 타히티의 ‘올랭피아’다

입력 2024-01-08 13:4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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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15)
폴 고갱, '죽은 자의 혼이 지켜본다', 마나오 투파파우 Spirit of the Dead Watching, 1892, 삼베를 댄 캠버스에 유채, 116.05x134.62cm, 울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최초의 걸작은 ‘죽은 자의 혼이 지켜본다’로 마우리족의 신전에 산다는 귀신들이 그 모티브였다. 

죽은 자들의 혼이 산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내용의 소설을 로티(Pierre Loti)라는 소설가가 썼다. 그 소설은 프랑스 아를 시절의 반 고흐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고갱 또한 그 소설을 읽고 타히티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고갱은 프랑스 브르타뉴 시절 젊은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우리가 겉에 걸친 문명이라는 허울을 벗어 던져버리고 우리 안에 있는 야성을 끄집어 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고갱은 브르타뉴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던 제자와 함께 중남미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에 갔었고 이제 타히티로 온 것이다. 

독일의 미술사학자이며 미학자인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은 미술사를 양식별로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고대 그리스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그리스인들이 창조한 하얀 대리석 피부에 균형 잡힌 몸매의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움이 ‘이상적인 미’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래 고대 그리스 석상에도 색이 칠해져 있었다. 다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탈색되고 하얀 대리석만 남았을 뿐이다. 백인이 가장 완전한 이상적인 미를 가졌다는 편견도 이 같은 오류에서 비롯된 착각이었다. 

피부색에 따른 인종의 분류는 스웨덴의 박물학자인 린네(Linne)의 ‘이명식 명명법’으로 알려진 ‘자연의 체계 Systema Naturae, 1735’에서 나왔다. 

그는 인간도 동물이기에 같은 방식으로 피부색에 따라 네 군(群) 즉, 백색, 홍색, 황색 그리고 흑색으로 분류하며 과학적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분류는 백인종을 중심에 두고 유색인종을 ‘친근한 이웃’이 아닌 길들이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 제국주의자들의 인종 차별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오용되었다. 

고갱은 이런 그림들을 가지고, 이제는 원주민을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인정해야 한다고 항변하고 있다. 테하마나의 검고 윤기 있는 피부와 치켜 올라간 눈도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은 문화이론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 1978‘에서 유명해진 용어로, 하나의 이론과 지식체계로 굳어진 ‘동양에 대한 서구의 왜곡과 편견’을 의미한다. 서구 제국주의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동양을 신비화한 다음 동양을 탐험하고 지배하며 착취해 왔다.

따라서 사이드의 주장에 따르면 이 그림은 백인 남성이 가진 오리엔탈리즘적 성적 환타지로 해석된다.

미술사학자 스위트맨(Sweetman)은 작품을 해석할 때 고갱의 성적 취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소녀의 두려움이 고갱의 공격적인 행동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주장하며, 이는 그의 아내 메테에 대한 성적 학대와 일치한다고 해석했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15)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Olympia, 1863년.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에 대해 마네(Édouard Manet)가 붙인 제목 올랭피아는 당시 인기있던 알렉상드르 뒤마 2세의 소설 ‘춘희’와 에밀 오지에의 희곡 ‘올랭프의 결혼’ 등에 등장하며, 올랭프는 매춘부들이 자주 사용하는 예명이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제목만 듣고도 마네가 누구를 그렸는지 당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15)
티치아노 베첼리오,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4, 캔버스에 유채, 119x165cm, 우피치 미술관

서양미술사에서 이상적인 누드의 전범(典範)처럼 여겨지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를 마네가 파리 매춘부의 초라한 침대에 올려 놓은 것이다. 

당대 부르주아와 상류층들은 정략 결혼을 했기 때문에 정부(情婦)를 두거나 매춘을 했다. 마네는 올랭피아로 감추고 싶은 그들의 진상을 파리지앵의 코앞에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네는 서양미술사에 가장 많이 욕을 먹은 화가로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근대 미술을 여는 ‘인상주의 아버지’로서 파리 미술계를 25년간 이끌게 된다. 기존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는 아방가르드(Avant-gard) 회화는 이런 전복(顚覆)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구현하며 새로운 사조를 개척했다.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주류 사조에 반발하며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려는 전위 예술을 정치적인 용어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아방가르드’라고 한다. 

마네 사후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는 그의 부인을 돕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클로드 모네가 조직한 공공 기부 자금으로
올랭피아‘를 구입했다. 그후 정부가 그것을 뤽상부르 박물관에 전시할 때, 고갱은 거기에서 3/4 크기의 사본을 그렸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15)
폴 고갱, ’올랭피아, 마네를 존경하며‘, 1891, 캔버스에 유채, 89x130cm, 개인소장

2023년 봄 오르세 미술관에서 열린 ’마네와 드가전‘에 이 작품이 전시되었다. 모델 빅토린 뫼랑의 얼굴과 흑인 하녀의 피부색이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나중에 타히티로 다시 돌아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갱은 아파트 현관 홀에 걸려있던 자신의 작품을 팔기로 했고, 결국 1895년 경매에서 에드가 드가가 230프랑에 낙찰받았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15)
폴 고갱, 왕의 아내, 1896, 캔버스에 유채, 97x130cm, 푸쉬킨 미술관

폴 고갱, 왕의 아내, 1896, 캔버스에 유채, 97x130cm, 푸쉬킨 미술관

고갱의 첫 번째 타히티 시대 그림들은 드가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동료들과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지는 못했다. 파나마에서 운하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 작품들의 반응을 기대했던 고갱은 실망했다.

1893년 파리의 한 전시회에서 '죽은 자의 혼이 지켜본다'가 전시되었을 때 몇몇 비평가들은 '올랭피아'와 구성적 유사성을 지적했다. 그렇기에 예술 및 문학 잡지의 창립자인 나타슨(Thadée Natanson)은 이를 "타히티의 올랭피아”, 프랑스 시인 자리(Alfred Jarry)는 "갈색 올랭피아"라고 불렀다.

미술사학자 그리젤다 폴록(Griselda Pollock)은 예술에서 백인 남성 미술사가의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여성에 대한 인식 부족을 지적한 페미니스트적 접근으로 유명한 학자이다. 그런 시각에서 폴록은 ’죽은 자의 혼이 지켜본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첫째, 마네는 ’올랭피아‘로 아카데미에서 그려지던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들의 누드를 비천한 파리의 매춘부로 전락시켰다. 고갱은 전통적 방식을 뒤집는다는 마네의 이런 방식을 이어받았다.

둘째, 고갱은 ‘화가들의 제왕’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이 그림의 모티브를 가져왔으며, 이를 통해 ‘올랭피아’에 대한 오마주를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갱은 선배들과 자신과의 차이를 보여주며 자신도 대가들과 동급임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고갱은 파리의 창녀 올랭피아를 ‘죽은 자의 혼이 지켜본다’에서 타히티 여성의 환영으로 재가공하여 표현했다. 고갱은 올랭피아 속의 흑인 하녀를 검은 죽음의 혼으로, 백인 창녀의 몸은 원시적인 소녀의 검은 신체로 대체했다.

또 올랭피아는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며 당당히 바라보지만, 고갱은 테하마나가 시선을 피하며 몸을 돌리고 엉덩이가 보이도록 엎드려 놓았다. 올랭피아보다 테하마나는 수동적이며 오히려 그림을 보는 관람자가 더 주도적이 되도록 하였다.

고갱은 ‘환영(幻影)’이라는 면에서 회화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고갱이 후대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 방식이었다. 그는 모더니즘 ‘원시주의의 아버지’로서 전통문화와 원시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환영을 추구했다. 고갱에게 영향을 받은 모더니즘 화가들은 그처럼 살거나 최소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고갱은 지적이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비평가들과 컬렉터의 관심을 얻을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는 대가들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차용하고 자신의 독창성에 접목시켜 이전에 없던 환영과 실재가 공존하는 그림을 그렸다. 어설프게 가져오면 모방에 불과하니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만들어야만 창의적이 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갱도 19세기라는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예술가에게는 시대의 각인이 찍혀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그러한 각인이 가장 깊이 새겨져 있는 사람이다. 좋아하던 싫어하건 간에, 설사 우리가 스스로를 고집스럽게 시대의 유배자라고 부를지라도 시대와 우리는 단단한 끈으로 묶여 있다. 어떤 화가도 그 끈에서 풀려날 수 없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