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씐 병’ 편견에 방치된 뇌전증…“관리·지원 입법돼야”

15일 ‘뇌전증 관리지원법 제정 촉구 위한 토론회’ 개최
국내 37만명 추정…오해·편견에 숨는 환자들
‘원정 치료’ 잇따라…권역 전담병원 마련 촉구
“권익신장·인식개선 위한 국가 시스템 절실”

기사승인 2024-02-16 1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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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씐 병’ 편견에 방치된 뇌전증…“관리·지원 입법돼야”
15일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2024년 세계 뇌전증의 날 기념식 및 뇌전증 관리지원법 제정 촉구를 위한 토론회’가 개최됐다. 사진=신대현 기자


‘악마가 씐 병’, ‘지랄병’, ‘간질’ 등은 모두 ‘뇌전증’을 잘못 일컫는 말들이다. 뇌전증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질환이지만 여전히 희귀질환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편견과 그릇된 인식 속에서 뇌전증을 숨기는 환자들도 적지 않다. 환자와 전문가들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뇌전증은 정신질환이 아니라며 치료와 돌봄에 대한 지원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15일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2024년 세계 뇌전증의 날 기념식 및 뇌전증 관리지원법 제정 촉구를 위한 토론회’가 개최됐다. 이번 토론회는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 심상정 녹색정의당 의원,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이 주최하고 대한뇌전증학회와 한국뇌전증협회가 공동 주관했다.

뇌전증은 뇌신경 세포들이 미세한 전기적 신호로 정보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뇌파가 발생하는 질환이다. 신경세포에 전기적 신호가 과도하게 흐르면서 불규칙하고 반복적인 발작이 생기는 게 주 증상이다. 질병의 특성상 발작 등으로 인해 일상생활, 경제활동에 어려움을 겪는다. 증상 중 주변 사람이 가장 많이 목격하는 전신강직간대발작은 전신이 뻣뻣해지고 팔다리가 떨리며 입에서 침과 거품이 나온다. 

뇌전증 환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뇌전증 환자 수는 15만747명으로, 2020년부터 매년 평균 2093명씩 늘고 있다. 뇌전증학회는 실제 환자가 37만명 이상일 것이라고 전한다. 뇌전증으로 진단받으면 대인관계, 취업, 결혼 등 여러 사회생활에서 제한이 나타날 수 있는 만큼 병을 숨기는 환자가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법적으로 지원을 받는 환자는 장애인으로 등록된 약 7000명에 불과하다. 약물로 증상이 조절되지 않는 중증 환자들만 정부의 도움을 받는 셈이다.

학회의 추정치대로라면 뇌전증 환자는 총인구 150~250명당 한 명 꼴로, 우리 주위에서 어렵기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희귀질환으로 인식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잘못된 인식과 함께 사회적 편견도 존재한다. 지난달 뇌전증학회가 뇌전증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 1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과거에 비해 환자와 보호자들의 뇌전증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개선됐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69.6%가 “분명 긍정적 변화가 있지만 아직은 미흡하다”고 답했다. 뇌전증으로 인해 환자들이 겪는 차별로는 ‘직업 선택의 어려움’(79.5%)과 ‘직장생활에서의 차별’(67.0%)이 가장 흔한 것으로 조사됐다. 

진단과 치료, 사회복지 지원 제도는 보완이 필요했다. 의료진의 39.3%는 진료 현장에서 겪는 가장 어려운 점으로 ‘건강보험급여 적용과 관련된 뇌전증 진단과 치료 제약’을 꼽았다. 다음으로 ‘뇌전증 환자를 위한 사회복지 제도 미흡’(38.4%), ‘환자와 보호자의 왜곡된 뇌전증 정보’(36.6%) 등을 들었다.

허경 뇌전증학회 이사장(세브란스병원 신경과 교수)은 “70% 이상의 환자가 약물과 수술 치료를 통해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치료를 두려워하거나 우울증과 불안장애 등 정신질환을 동반하기 쉬운 여건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환자가 질병적 증상 이상의 고통을 받는 상황은 다른 만성질환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다”며 “뇌전증 관리지원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악마 씐 병’ 편견에 방치된 뇌전증…“관리·지원 입법돼야”
뇌전증 환자 가족들과 전문가들은 ‘뇌전증 관리지원법’을 제정해 국가 지원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진=신대현 기자


“‘뇌전증 관리지원법’ 제정해 지원체계 갖춰야”

지난 2020년 ‘뇌전증 관리 및 뇌전증 환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뇌전증 관리지원법)이 국회에 발의됐지만 이렇다 할 논의 없이 계류돼 있다. 해당 법안은 뇌전증 예방, 진료, 연구와 뇌전증 환자에 대한 지원 등에 관한 정책을 수립·시행할 법적 근거를 담고 있다. 환자와 가족, 전문가들 모두 이 법을 통해 뇌전증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환자의 인권 보호와 재활, 자립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흥동 뇌전증협회 회장(강북삼성병원 신경과 교수)은 “임상의사가 뇌전증 관리지원법을 촉구하는 이유는 진료실 안에서 환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간 국내 뇌전증 환자에 대한 지원은 시민단체와 학회 등 민간단체에 의존해왔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37만명의 뇌전증 환자와 200만명의 가족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뇌전증 환자와 가족들의 권익 신장과 인식 개선을 위한 국가적 지원체계가 절실하다”고 피력했다.

환자가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과제다. 치료를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환자가 많기 때문이다. 장시간 이동 과정에서 발작 증상이 나타나 쓰러져 다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보건복지부 지정 뇌전증지원센터를 운영하는 홍승봉 센터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은 “서너 시간씩 지방에서 서울로 이동하다 넘어져 이가 부러진 중증 환자도 있었다”며 “환자가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전국에 권역별 뇌전증 전담병원을 지정한다면 1년에 20~30억원의 예산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서울을 찾는 환자들을 도울 수 있다”고 짚었다.

이날 토론회에선 환자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공유됐다. 중증 뇌전증을 앓던 아이를 떠나보낸 조다솜씨는 “아이에게 달아놓은 커다란 의료기기들을 수용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 마땅치 않고, 증상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집에서만 아이를 키운 게 안타깝다”며 “중증 환자들의 이동 수단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었다면 소풍 같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사랑하는 아이를 뇌전증으로 떠나보내야 했다는 허도경씨는 “뇌전증 관리를 위해 국가에서 받은 지원이 뭐였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집에서 뇌전증 환아를 돌보는 일은 오롯이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면서 “낮 동안 만이라도 이들을 보살펴줄 수 있는 주간보호센터가 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모든 아이들은 교육의 권리를 갖지만 뇌전증 환아들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도 했다. 허씨는 “경련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는 아이를 거부한다. 사회에 나가 일을 하고 싶어도 뒷받침이 없다”라며 “배움도, 일상도 힘든 아이들과 가족들은 오늘도 아픔을 감내하는 실정이다. 뇌전증 관리지원법이 조속히 통과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정부는 뇌전증 환자와 가족들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며 뇌전증 관리지원법에 대한 검토를 이어가겠다고 했다. 신희성 복지부 질병정책과 사무관은 “법이 있으면 체계적으로 지원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라며 “그동안 뇌전증과 관련해 발의된 법안들도 복지부 차원에서 검토됐던 것들”이라고 말했다. 신 사무관은 “21대 국회가 끝나 법안이 폐기되더라도 22대 국회에서 재발의 돼 다시 논의될 수 있다”며 “계속해서 살피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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