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니나처럼 자유롭게…‘D.P.2’ 배나라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3-08-18 06: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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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니나처럼 자유롭게…‘D.P.2’ 배나라 [쿠키인터뷰]
‘D.P.2’ 속 배우 배나라. 넷플릭스

젊은 연극학도는 니나가 되고 싶었다. 안톤 체호프가 쓴 희곡 ‘갈매기’에 나오는 주인공, 그처럼 살고 싶었다. 학교 선배는 이런 그를 마구 때렸다. “니나 여자 역할이잖아. 게이 새X가 왜 이렇게 나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간 군대에선 폭력이 더욱 극심했다. 남자는 도망쳤다. 신분을 세탁해 숨어 살았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드래그 공연을 했다. “내 얼굴엔 메이크업/ 카세트테이프 노래/ 가발로 마무리하면…” 뮤지컬 ‘헤드윅’ 노래가 그의 18번이었다.

넷플릭스 ‘D.P.2’ 속 장성민(배나라)의 삶은 기구했다. 성 소수자 혐오가 만연한 사회는 그에게 지옥이었다. 그 안에서 성민은 질식하기보단 몸부림치길 택했다. “죽더라도 밖에서 죽을 거야.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성민의 이런 대사를 들은 한 시청자는 SNS에 ‘죽을 만큼 좋아하는 게 있는 사람은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구나’라고 적었다.

‘갈매기’ 니나처럼 자유롭게…‘D.P.2’ 배나라 [쿠키인터뷰]
성민은 탈영 후 클럽에서 드래그 아티스트로 일한다. 넷플릭스

“성민이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살고 싶었을 거예요. 탈영은 해선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성민이는 자기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최근 서울 상암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배나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준희 감독이 오디션을 세 번이나 연 끝에 찾은 원석이다. 10년 넘게 공연계에서만 활동하다가 ‘D.P.2’로 처음 카메라 연기에 도전했다. 배나라는 “죽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성민의 말이 시청자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로 남을 것 같다”고 했다.

한 감독은 이런 성민을 ‘갈매기’ 속 니나에 비유했다. “니나는 갈매기를, 갈매기가 자유로움을 상징하듯 성민도 자유롭길 바랐을 것”이라는 게 배나라의 해석이다. 성민과 비슷한 또 다른 인물은 헤드윅. 동베를린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트랜스 젠더다. 성민은 헤드윅이 동명 뮤지컬에서 선보이는 노래 ‘위그 인 어 박스’(Wig in a box)를 부른다. 배나라는 이 장면을 찍을 때 많이 울었다. 하지만 한 감독은 “울고 난 직후 또는 울기 직전의 모습”을 주문했다고 한다. 배나라는 “고립된 슬픔, 공허함, 외로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배나라는 ‘D.P.2’를 찍는 5개월여간 10㎏를 뺐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성민이 탈영 후 나날이 피폐해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2018년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앤젤(드래그 퍼포머)을 소화한 경험을 토대로, 드래그퀸 공연을 찾아다니며 장성민을 만들었다. 화장과 의상 등은 유명 드래그 아티스트 나나영롱킴을 참고했다고 한다.

‘갈매기’ 니나처럼 자유롭게…‘D.P.2’ 배나라 [쿠키인터뷰]
배나라. 넷플릭스

배나라에게도 죽을 만큼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가수를 꿈꿨던 소년은 음악학원 선생님 권유로 뮤지컬에 발을 들였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청소년 뮤지컬에 처음 출연한 날 그는 기억을 잃었다. “시간이 순식간에 삭제됐다”는 감각만 남아있다. 11년 차 배우는 요즘도 무대에서 ‘시간 순삭’을 종종 겪는다. 경력이 쌓여도 “긴장감”과 “집중력”은 신인 때와 비슷하다고 한다.

창작뮤지컬 ‘프라미스’로 데뷔해 자기 이름을 가진 배역을 따기까지 걸린 시간이 6년. 배나라는 “당장 스타가 되려고 조바심내지 않으려 했다. 누구에게나 한 번은 기회가 온다고 생각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큰 사람이 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배나라 역시 “기다림의 시간이 나를 성장하게 했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에게 기다림이란 전진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면서 나를 지키려고 했어요.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래서 한걸음 혹은 반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면 내게도 기회가 올 거라고 믿으면서요. 관객 여러분을 만날 때마다 늘 성장하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리곤 해요. 나를 낮잡지 않고, 내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지 않고, 제 몫의 책임감을 다하면서 성장하고 싶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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