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9)

다비드 '마라의 죽음', 그 시대적 배경

입력 2023-12-18 1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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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9)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1793, 165x128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미술은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미술이 우리를 의식 있는 시민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걸까? 또 미술의 힘은 정치권력을 위해 이용될 수도 있는 걸까? 프랑스가 대혁명의 돌풍으로 직격탄을 맞으며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추구하는 ‘민중을 위한 나라’로 다시 태어나고 있던 시기엔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8)는 바람직한 예술이 갤러리를 ‘도덕의 전당’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위대한 영웅, 희생자, 순교자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예술이 인간의 삶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기에 다비드는 “그 열정을 매우 정제된 표현방식으로 드러내며 근대의 시각적인 정치 선전을 시도하였다”라고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사이먼 샤마가 말했다.

다비드의 그런 생각의 정점에 대표적으로 자리한 작품이 바로 '마라의 죽음'이다. 이 그림의 원제목은 '마라에게, 그의 마지막 비명의 순간에'이다. 이 그림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여러 역사적 인물들과 혁명의 전개 그리고 화가가 정치에 참여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우선 알아야 한다. 

예술철학자 가다머(Hans – Gadamer, 1990~2002)는 “예술 작품의 진리는 해석자의 지평에 의해 변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대 해석학에서 “인간의 존재는 시간적이고 역사적이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지평 속에서 미래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사태를 이해한다는 것도 자신의 역사성을 이해하면서 자신 안에서 역사적 현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말했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9)
 다비드,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794, 루브르 박물관, 파리

대혁명 전, 당시 화풍은 루이 15세가 기용했던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부세의 그림이 주도했고, 그의 작품은 파스텔 톤으로 향기를 내뿜으며 왕족이나 귀족 등 소수에게만 봉사하며 쾌락을 선사하는 유희화(遊戱畵)가 주종이었다.

즉, 예술이 인간의 미감과 쾌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때 루이 15세의 프랑스는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패전하여 캐나다와 인도를 양도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9)
프랑수아 부셰, '마드무아젤 오뮈르피', 캔버스에 유채, 1751,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퀼른

백과사전파 철학자인 디드로는 부세의 그림을 이렇게 비평했다.

“진실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 그렇게 우아하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양치기 소녀가 어디 있으며, 사람 사는 마을과 평범한 남녀, 그리고 아이들과 황소, 젖소, 양, 개들은 온데간데없고 단지 아치 교각 아래로 시골 풍경이 펼쳐지는 것을 대체 어디서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구나 이 풍경을 엉터리라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혹적인 악이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청춘 남녀는 진실한 취향이나 이상, 미술의 진중함에는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속물이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9)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1755~1842),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부분, 1778, 캔버스에 유채, 빈 미술사 박물관

대혁명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inette d’Autriche, 1755~1793)는 1774년 프랑스 왕위계승자 루이 16세와 결혼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로 불린다.

대혁명 전부터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에 간섭하는 오스트리아 여자’라 부르며 낭비가 심한 어린 왕비라며 싫어했다. 가엽게도 그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두 나라의 동맹을 위해 정략 결혼의 대상이 된 15살의 순진한 희생양이었다.

일생을 악평에 시달렸지만 당시 분위기는 왕비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세간의 추측과는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오빠의 간섭을 차단하고 있었다. 사치스럽다는 부분도 나폴레옹의 왕비 조세핀이 쓴 돈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쓴 돈의 10배가 넘었다는 점에서 사실이 아니다. 국고의 파산은 사실 미국 독립전쟁 지원과 선대의 향락 때문이었지 그녀의 책임은 아니다.

다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 궁 한 편에 영국식 농촌을 만들어 놓고 부세의 그림처럼 목가적인 차림으로 전원생활을 즐기며 사치와 환락을 피해 영혼을 달래고 있었다. 

다비드가 9살 때 철강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권총 결투로 숨을 거두었다. 삼촌들의 지원으로 다비드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미술 전문가인 스승 조제프-마리 비엥의 문하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로마 시대 부조 작품에 있는 세로 홈을 새긴 기둥과 고대 의상들은 그리는 법을 배웠다. 다비드는17살에 왕립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며 로마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많은 주택들이 화산재에 묻혀버렸다. 이 지역은 18세기 중반에 발굴이 시작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업 도시 폼페이는 화산재와 바위에 묻혔고 규모는 작지만 보존 상태가 좋은 휴양지 헤르쿨라네움은 화쇄암과 흙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발굴 현장은 그 시대가 순간적으로 멈춰버린 듯 생생한 생활상과 사회를 보여주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자식을 끌어안고 그대로 화산재에 묻힌 모자상과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그대로 박제가 되어버린 황망한 사람들의 모습은 1,900년의 시간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빵집의 화덕에서는 방금 빵을 구어 낸 듯 구수한 냄새가 나는 듯했으며, 폼페이의 공중 목욕탕은 대리석과 납 배관을 갖추어 지금의 어느 목욕탕보다도 시설이 뛰어났다.

인류 최고(最古)의 직업인 매춘업소로 가는 길에는 신발 크기를 재서 청소년의 유해 업소 방문을 차단하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도로에는 이탈하지 않고 마차 바퀴가 굴러 갈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었다. 두 곳의 유적지에서는 모자이크, 조각 특히 벽화를 통해 그 시대의 예술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18세기 중반 발굴이 시작되자 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화가 다비드가 고전적인 주제에 심취하게 된 이유는 펜싱 경기에서 얼굴 자상을 입고 우울증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종양이 생겨 입이 돌아가 버려 마치 복숭아를 입에 물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런 기형이 당시 프랑스에서는 매우 흔했지만, 영국인들은 ‘부어 오른 뺨을 한 뚱뚱한 다비드’라고 불렀다. 게다가 다비드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그는 거창한 작품들을 창작하여 엄숙하게 그림으로 자신을 대변하였다. 

당시 야망 있는 화가들에게 로마 유학은 필수 과정이었다. 로마에서 고대 조각을 드로잉하며 조화와 이상이라는 고전주의 미술의 첫 번째 원칙과 고상함과 진중함을 동시에 체득하여 돌아왔다.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를 토대로 한 그들의 작품 중 우수작은 매해 8월 하순부터 9월 하순까지 열리는 '살롱'에 출품, 전시되었다.

이 살롱에는 귀족과 입장권을 구입할 여유가 있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고관이나 성직에서부터, 생선장수와 시장의 여인들까지 작품을 감상했다. 그들은 바로 ‘민중’이었고, 선량한 이웃들이었다. 그림을 향유하는 계층이 제 3신분인 ‘민중’으로 확대되었고, 정치적 기반 역시 그들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로마 시대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한 위인들의 임종 순간 등 다비드의 예술적 주제들은 야심에 가득 찼다. 특별히 임종의 순간은 비장미와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므로 인기 있는 장면이었다. 그 중 대표작은 잘 알려진 '세네카의 죽음'이다. 로마시대 철학자 세네카가 자신의 제자인 네로 황제의 명으로 자살하는 장면은 ‘통치의 무능함과 야만성’을 말해주는 주제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9)
루이 다비드, '세네카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1773, 프티팔레 박물관, 파리

위와 같이 다비드는 로마 시대의 위인들의 죽음을 통해, 민중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고, 제3의 신분인 민중은 그림을 통해 대혁명의 씨앗을 잉태하기 시작했으니 폭풍 전야의 작은 파도는 미술에서 일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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