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3)

‘마네 부부의 초상’은 왜 훼손되었나?

입력 2024-02-05 10: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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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3)
에드가 드가, 마네 부부의 초상, 1868~69, 일본 기타규수 시립 미술관

필자는 퓰리처상 수상자인 미술평론가 서배스천 스미(Sebastian Smee)의 <관계의 미술사 The Art of Rivalry>에서 '마네와 드가'의 스토리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래서 두 화가의 라이벌 관계를 증언해 주는 ‘마네 부부의 초상’을 보러 일본의 기타큐슈 시립 현대미술관을 가고 싶었다. 

마침 오르세 전시를 기획한 관계자가 그 책을 읽은 듯, 전시 제목이 ‘마네와 드가’이고 더군다나 그 작품이 파리로 와 볼 수 있게 되니 쾌재를 불렀다.​​​

1868년 말, 드가(Edgar De Gas, 1834~1917)는 절친한 마네 부부의 초상화를 그렸다.

불그스레한 얼굴의 마네(Edouard Manet)는 소파에 거의 눕듯이 앉아 있고 그의 아내 수잔은 남편에게 등을 보이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그녀는 머리카락를 모두 올렸기에 옆모습에서 작은 귀와 굵은 목이 드러난다. 

의자에 앉아 풍성한 치마는 주름지고 접혀져 있다. 블라우스는 얇게 비치는 옷감으로 수잔의 분홍색 살집이 드러난다. 

예술적 기교가 뛰어난 드가의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강렬한 색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화폭의 가운데에 자리한 붉은색 쿠션과 마네의 양말뿐이다. 검은 양복을 입은 마네가 조끼와 구두까지 색을 맞춘 걸 보면 마네는 천상 화가이다. 

마네와 드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미스터리가 있다. 비록 그들이 정기적으로 만나고 같은 모임에서 어울렸지만, 그들의 첫 만남의 날짜는 알 수 없고, 그들 사이의 어떠한 서신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동시대 작가 조지 무어는 그 둘의 관계를 ‘불가피한 경쟁으로 방해받은 우정’이라고 묘사하면서 감탄과 짜증이 섞인 그 둘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드가는 마네의 초상을 3점이나 그린 반면 마네는 드가의 초상을 그리지 않았다. 그중 피아노 치는 수잔과 소파에 앉은 마네를 그린 이 작품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 

마네는 드가가 선물한 그림에 불만을 갖고, 아내가 등장하는 캔버스 부분을 잘라냈다. 이 행동은 두 예술가 사이의 가장 유명한 불화의 원인이었다.​

드가는 마네의 ‘이상하게 앉아있는 습관적인 자세’를 포착하여 피아노를 연주하는 수잔과 함께 그린 이중 초상화이다. 마네는 평소 살롱에 초대되어도 바닥에 앉는 등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었다. 

수염을 기르고 말쑥하게 차려 입은 마네는 긴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얼굴은 무표정하고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상태이다. 마네의 건너편에는 피아노 치는 수잔이 있다. 

이 그림은 크기가 매우 작다. 마치 어제 그려진 것처럼 생생한 느낌을 주며, 초연함과 무심한 기운을 풍긴다. 그리고 다행히 미화나 거짓된 감정없이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마네 부부가 이 그림의 모델이 되어준 시기는 1868년에서 186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당시는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를 그린 지 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지금이야 당대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지만, 그 무렵만 해도 비평가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두 작품의 도발성은 대중의 야유와 조롱을 유도할 만큼 악명이 높았다. 

마네는 이후에도 여러 해에 걸쳐 깜짝 놀랄 정도로 창의적인 작품을 계속 내놓았지만 그의 그림을 향한 격렬한 비평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따라서 마네의 악명은 높아만 갔다. 

​드가는 어느 날 마네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마네가 “너무 못생겼다"라며 칼로 수잔의 얼굴을 자른 후였다. 드가는 훼손된 자신의 작품을 보고 화가 나고 당혹스러워 인사도 없이 그림을 가지고 돌아왔다. 

화상(畵商)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말에 따르면, 화가 난 드가는 이런 메모와 함께 작업실에 있던 마네의 정물화를 돌려보냈다.

“무슈, 당신의 작품 자두를 돌려보냅니다.”

두 사람은 곧 화해를 했지만 한번 금이 간 관계는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인문학의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3)
에두아르 마네, 피아노를 연주하는 마네 부인, 1868~69, 캔버스에 유채, 38x46cm, 오르세 미술관 

두 작품은 배경이 같다. 매주 목요일 파리 생 페테르부르크의 거리의 3층 아파트에서 드가를 포함한 친구들이 오면 수잔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많은 수잔의 초상화 중에서 이 그림은 드가가 못 생기게 그렸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출신이며 사회적 지위가 낮은 수잔은 마네 동생들의 피아노 교사였다.

21살의 수잔과 19살의 마네는 1850년부터 비밀스럽게 연애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수잔은 임신을 했다. 신분이 낮은 외국인 여성과의 부적절한 행동은 부르주아 가정의 법도에 어긋난 일이었다. 

마네는 십 년 동안 수잔과의 관계를 숨겼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 년 뒤 결혼했다. 이 사실을 가까운 사이였던 드가도 몰랐다. 마네는 수잔과의 관계를 숨기며 린호프의 존재에 대해 양가(兩價)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네 주변에 항상 여자들이 있었다. 빅토린 뫼랑은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 등 모델이었다. 

또 명문가 출신이고 화가인 베르트 모리조는 파리 상류층의 지성과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모델이었다. 마네가 유일하게 제자로 인정한 에바 곤잘레스를 만나며 더욱 수잔과 비교되지 않았을까? 

마네가 초상화를 그려주겠다는 데 거절할 여자들은 없었다. 그런 마네의 심리적 갈등이 그림을 자르는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인문학의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3)
에두아르 마네, 검을 든 소년, 1861,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마네는 어린 레옹 린호프를 모델로 스페인풍으로 흰 칼라에 검은 벨벳 옷을 입고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마네는 린호프를 친자로 인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네 사후에도 사람들은 수잔의 남동생으로 알고 있었다. 

마네는 어머니에게 수잔의 임신을 솔직히 털어놓았고, 수잔의 어머니를 파리로 불러 사태를 수습했다. 태어난 수잔의 아들은 레옹 린호프(Leon Leenholf)란 이름으로 수잔의 남동생으로 출생 등록하게 한 것이다. 마네는 레옹의 대부 역할을 하였다. 이는 마네가 부모에게 좌절감을 심어준 일련의 행동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네는 20대가 되면서 화가 쿠튀르의 지도 아래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며 기대주로서 화단의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우유부단하고 대학에 계속 낙방하던 문제아에서 친절하고 좋은 인상을 풍기는 인물로 성장한다. 

당시 마네는 감각적인 화법, 뚜렷한 윤곽에 명암의 급격한 전환을 바탕으로 하는 활기차고 신선한 화풍으로 비평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마네와 드가는 7월 왕정(1830~1848)이 시작될 무렵 파리에서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공통점이 있다. 

드가의 가문은 재계와 금융계였다. 명성이 높은 학교에 다녔던 마네와 드가는 둘 다 예술적 천직에 종사하기 위해 그들의 집안 배경에 의해 권장된 법률 공부를 포기했다. 해군사관학교 시험에서 두 번 낙방한 마네는 미술학교에 갔고, 드가의 아버지 또한 아들의 선택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 

마네와 드가는 국립고등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가지 않고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함께 공부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네와 드가의 첫 만남은 1860년대 초 루브르 박물관에서 드가가 조각할 사본을 만들고 있던 벨라스케스의 그림 앞에서 이루어졌다. 둘 다 어릴 때부터 가족과 함께 박물관을 방문하는 게 익숙하였다. 

그들의 습작기와 견습 기간은 루브르 박물관이나 제국도서관의 인쇄실에서 옛 대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데 기반을 두었다. 그 둘의 사회적 위치와 가족적 배경은 여행, 예술 교육 그리고 문화적 소양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두 예술가는 1850년대에 이탈리아를 여러 번 여행했는데, 그들은 박물관과 기념물을 장식하는 프레스코 화(畵)에서 걸작들을 발견했다. 당대의 거장들이 존경하던 인물은 신고전주의자 앵그르와 낭만주의자 들라크루아였다. 

존경하였기에 단순한 모방을 넘어, 인용으로부터 오마주, 심지어는 창작한 듯한 인상을 풍기지만 실은 표절 작품인 파스티체(Pastiche)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인문학의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23)
에두아르 마네, 독서(마네 부인과 아들 레옹 린호프), 1866년경, (아마도 1873년 다시 그려진 린호프는 성장 후 드가의 은행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이 그림은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물감으로 단번에 그리는 알라 프리마(Alla Prima)기법이다. 빛으로 가득 찬 소파에 앉은 수잔을 거친 붓질로 빠르게 그려 인상파의 아버지다운 작품이다.

모델로 선 수잔은 ‘네덜란드 사람답게 무척 태평한 스타일’이라고 모리조의 딸 줄리가 말했다. 마네 사후, 제 3자가 마네의 작품을 개작하여 마네 이름으로 판매해도 무심한 수잔은 잠자코 있었다.

린호프는 1894년 인쇄소를 운영하며 마네의 유작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팔기 위해 세 부분으로 나눴고, 한 부분은 팔고 나머지 두 부분은 화상들에게 맡겼다.

더구나 한 화상도 그림을 또 잘라냈다. 그러나 다행히 드가가 그 조각 그림들을 다시 수집하여 원작대로 복원했다.

마네 작품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한 린호프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의 데생도 인쇄소의 습기 많은 곳에 보관해 훼손시켜 모리조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수잔과 린호프는 마네에 대한 예술적 이해가 부족했다. 

모델은 화가의 붓끝에서 생명을 얻고, 모델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는 특별한 존재이다. 특히 가족의 경우 모델에 대한 화가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네 부부의 초상’은 마네 부부뿐 아니라 마네와 드가의 관계도 증언해준다. 두 예술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했고, 독립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급진적이며 파괴적인 독창성을 획득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