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없이 2년… 임신중지 입법공백 언제까지

형법 ‘낙태죄’ 2019년 합헌불일치, 2020년 폐지
WHO 필수의약품 ‘미프지미소’ 국내 도입 무산
“여성 건강권, 재생산권 사각지대 방치”

기사승인 2022-12-29 07: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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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 2년… 임신중지 입법공백 언제까지
쿠키뉴스 자료사진

임신중지가 2년째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에 남아있다. 

앞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임신중지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수술을 한 의사와 여성을 처벌하도록 한 형법 제 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두 조항은 2020년 12월31일부로 효력을 상실했다. 이 시점까지 국회는 임신중지 관련 법률과 제도를 마련할 1년8개월가량의 시간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가시화한 대책은 없다.

정부가 그동안 마냥 수수방관한 것은 아니다. 형법상 낙태죄 폐지 이후 후속조치를 위해 여러 법안을 내놨다. 대표적으로 정부가 마련한 개정안은 임신 14주 이내에는 여성의 결정에 따라 임신중절을 할 수 있고, 24주까지는 제한적으로만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일각에서는 여성들이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임신중지를 결정하려면, 현실적으로 14주는 너무 촉박하다는 반발이 일었다. 

의원 발의안도 여럿 등장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안은 인공임신중절수술을 ‘인공임신중단’으로 명명하고, 수술뿐만 아니라 약물 등 의학적 방법으로 임신을 종결하는 것을 포함시켰다. 임신의 유지 또는 종결에 대한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원칙적으로 보장하고, 인공임신중단을 허용할 수 있는 범위는 ‘임산부 본인의 동의를 받은 경우에만’으로 규정했다.

임산부의 권리 보장 수단을 강화하는 데 집중한 개정안도 나왔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안은 임산부가 충분한 정보 및 상담을 토대로 인공임신중단 여부를 스스로 판단·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국가와 지자체가 책임질 것을 명시했다. 또한 임산부가 인공임신중단을 결정한 경우, 의사가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임산부의 요청에 따라 인공임신중단을 하도록 규정했다. 임산부의 경제적 능력을 고려해 의료비도 지원하도록 하는 조항도 담겼다.

정부안과 비교해 보수적인 기준을 제시한 사례도 있다.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에는 의사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인공임신중절 요청을 거부 할 수 있고, 이런 경우 의사에게 해고를 비롯한 불이익을 주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서 의원은 이와 동시에 형법 개정안도 대표발의, 인공임신중절 허용 기간을 임신 10주 이내로 제한하는 규정을 제시했다.

임신중지 제도화와 관련한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현재까지 나온 법안들은 모두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헌법재판소가 합헌불일치 결정을 내린지 3년8개월, 낙태죄가 효력을 상실한지 2년이 경과했지만 임신중지가 불법인지 합법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다. 

최근에는 임신중지 약물인 ‘미프지미소’ 도입도 무산됐다. 미프지미소는 정부안을 비롯한 모든 모자보건법 개정안에서 활용을 전제한 임신중지약물이다. 해외에서는 약 70개국에서 처방하고 있으며, 세계보건기구(WHO)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상태다. 미프지미소는 국내에서 품목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수입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불법적인 경로로 유통되는 문제가 적지 않았다.

임신중지 제도화 논의 과정에서 국내 제약사 가운데 현대약품이 미프지미소를 수입하고자 나섰다. 현대약품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지난해 7월 미프지미소의 품목허가를 신청하는 자료를 제출하고, 심사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식약처는 안전성, 유효성, 품질 등과 관련된 일부 자료 보완을 요청했고, 현대약품은 자료 제출 기한을 2회 연장한 끝에 결국 허가신청을 자진 취하했다.

이에 시민사회계에서는 수년 동안 정책을 마련하지 않는 정부를 향한 비판이 거세다.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에 관한 권리를 제도권 밖에 방치한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암암리에 임신중지를 시도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활동가는 28일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기자회견을 통해 “임신중지 당사자와 의료인은 한국에 있다는 이유로 WHO 필수의약품인 유산유도제를 처방하지도 사용하지도 못하고, 의료비 걱정 때문에 임신중지를 미뤄야 하는 야만적인 건강권 공백지대에 방치됐다”며 “정부는 입법이 되지 않았다며 국회탓, 자료제출 안했다며 제약사 탓하며 정부가 져야 할 책임은 회피한다”고 지적했다. 

서 활동가는 “상황의 가장 큰 원인제공자는 다름아닌 정부”라며 “재생산 권리에 대한 정부의 인식 결여이자, 정치적 득실을 따지며 기본권조차 부정하는 정권의 패착이자, 현정부가 가열차게 추진하고 있는 시장중심 의료체계가 일으킨 모순의 결과로 발생한 건강권 공백사태”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정책을 만들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나왔다. 앎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그동안 여성과 시민사회는 임신중지 접근성 확대, 보건의료 체계 구축, 종합 정보 제공 시스템 마련, 사회적 낙인 해소, 의료인 교육 및 포괄적 성교육 시행 등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을 위한 요구 및 대안을 수 차례 제시했다”며 “그중 정부가 진지하게 검토하여 추진했거나 조만간 추진할 예정인 정책은 무엇인가”라고 날을 세웠다.

이어 앎 활동가는 “오히려 지난 22일 교육부는 2022 개정 초·중등학교 및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확정·발표하고 ‘성평등’, ‘성소수자’, ‘재생산권’, ‘섹슈얼리티’ 등의 표현을 삭제했고, 자유롭게 임신중지를 선택할 권리나 임신중지에 필요한 정보 등은 고의로 배제했다”며 “시대착오적 개악을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