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5)

​모네는 '인상, 해돋이'를 어디서 그렸을까?

입력 2023-12-04 13: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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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사용하며 빛의 효과 꾸준히 추구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파리 1840~ 지베르니 1926)는 오랜 활동 기간 내내 흘러가는 순간을 포착하고, 색상을 사용해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일을 가장 꾸준히 추구한 인상파 화가이다.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노르망디 지방 대서양에 면해 있으며 르아브르(Le Havre)에서 식품상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르아브르라는 도시 이름은 프랑스어로 항만, 항구를 뜻한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5)
​모네, 레옹 만숑의 캐리커처 1856년경, 56x42cm, 흰색 강화 흑연, 루앙 미술관

고교시절 신문에 캐리커처를 그려 용돈을 버는 모네의 그림을 본 유명 화가 외젠 부댕(Eugene Boudin, 1824~1898)은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직접 가르쳤다. 르아브르와 가까운 옹플뢰르(Honfleur​) 출신인 부댕이었기에 인상주의를 선도하는 진정한 외광파(外光派)였다.

부댕에게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구름과 대기의 표현을, 네덜란드의 화가 바르톨트 용킨스(Johan Barthold Jongkind, 1819~1874)로부터는 빛에 반사되는 풍경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 르아브르의 앙드레 말로 미술관은 외젠 부댕의 작품 240점을 기증 받아 소장하고 있다. ​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5)
외젠 부댕, 트루빌 베이 플룻의 트루빌 하버 입구 하펜인파흐트 Trouville Harbour Entrance at High Tide Hafeneinfahrt in Trouville bei Flut, c. 1892~96, 앙드레 말로 미술관, 르아브르

​1862년 파리 샤를 글래드(Charles Gleyre, 1806~1874)의 작업실에 들어간 모네는 그곳에서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 프레데릭 바지유(Frederic Bazille, 1841~70) 등을 만나 교류했다. 바르비종 화파와 마네에게 영향을 받은 모네는 파리 시내와 센 강가의 근교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돼지 오줌보에 물감을 넣어서 가지고 다니던 불편을 해소하고자, 1841년 미국에서 아연 물감 튜브가 발명되었다. 그 덕분에 물감을 가지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가 훨씬 더 편리 해졌다. 19세기 후반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에게 현실의 모방과 재현을 경쟁할 수 없게 만들었다.

화가들은 기차를 타고 프랑스에서 발명된 접어서 어깨에 맬 수 있는 이젤을 가지고 야외로 나갈 수 있게 되니, 그런 화가들을 ‘외광파’라고 불렸다. 그들은 답답한 작업실을 떠나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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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에 전시된 모네가 수집한 우키요에(일본 목판화).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

17세기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일본에서 수입되는 도자기를 포장하기 위해 우키요에는 포장지 및 완충제로서 처음 유럽에 들어오게 되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은 도자기만 필요했으므로, 화려한 종이 완충제는 하인들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어느 날 생선을 사온 모네는 우키요에 포장지를 보고 깜짝 놀라 생선가게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본 목판화를 전부 사왔고, 그로부터 그의 우키요에 수집이 시작되었다. 

평면적인 구성과 화사한 색채의 우키요에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공식적인 루트로 수입되었다.

자포니즘(Japonism)이 대세로 자리하게 되며 드가, 고흐, 고갱 등 당시의 인상주의 전시에 참가하던 많은 화가들이 일본 목판화를 수집했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판화로 찍어 내기 위해 다섯 가지 이하의 화려한 색감, 풍경에 작게 그려진 인물, 얇게 칠해진 색 등이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요소이고, 이것들은 신고전주의 회화에서 볼 수 없던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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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에 전시된 모네가 수집한 우키요에.

​​1667년 이래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전람회가 루브르 궁의 ‘살롱 카레(Salon Carr)’에서 개최 이래 살롱은 공개적인 전람회를 의미한다. 모네는 1874년부터 1882년까지 살롱에 그림을 전시했지만 그 후에는 거절당했다.

보불 전쟁의 기간에는(1870~1871, 프로이센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프랑스가 패배하였다) 화상(畵商) 볼라르의 후원으로 모네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월리암 터너와 존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경제적으로 후원해주던 바지유가 29살에 보불전쟁에서 전사하자 그는 프랑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악의 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이며 미술비평가인 샤를 보들레르는 '근대 생활의 화가'에서 “근대성은 일시적인 것, 속절없는 것, 우발적인 것으로서 예술의 반을 차지하며, 예술의 나머지 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들레르는 이상주의의 완벽한 미를 중시하는 신고전주의 화가들이 성서, 신화, 역사 등 과거의 죽은 미학을 신봉하는 것을 비판하며 ‘지금, 여기’ 파리 시민들이 살아가는 삶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주의의 구스타브 쿠르베, 낭만주의 들라크루아,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며 인상주의의 포문을 연 마네 등이 새로운 미학을 정립할 수 있는 이론을 세웠다. 

파리에 온 19살의 모네는 1865년 동료인 바지유의 화실에서 모델인 18살 카미유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당시 모델은 하녀와 매춘부 같은 취급을 받았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으로 모네는 르아브르의 집에 카미유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모네는 1872년 11월 14일 그의 32번째 생일을 맞아 혼자 르아브르 고향집에 갔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5)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48x63cm, 캔버스에 유채, 마르모탕 미술관, 파리

위 작품은 생일 날 혼자 고향에 내려간 모네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주도인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짧은 시간에 그린 것이다. 근대 도시인 르아브르 항구의 크레인과 공장 굴뚝 사이로 붉은 해가 떠오르며 도시가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인상주의라는 명칭을 탄생시킨 '인상, 해돋이(1872)'였다.

빠르게 해가 떠오르는 순간을 포착해 그린 그의 작품을 본 비평가 루이 르로이는 “그 작품 참 인상적이다”라고 비꼬았고, 그래서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영국에서 한창 유행하던 ‘월리암 모리스가 그린 벽지보다도 못한 그림’이라는 잔혹한 평가도 받았고, 충격을 받아 유산할 수도 있으니 ‘임산부는 전시회를 보러 오지 말라’는 만평이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그런 혹평의 원인은 캔버스에 색칠이 완전히 되지 않아서 작품이 무척이나 전복(顚覆)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태양의 느낌은 고전주의 풍이지만, 붓터치가 그대로 드러나고 색상은 절제되었으며, 실루엣만으로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며 전달하고 있으니 그 데생은 가히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

도널드 올슨 텍사스대 천문학자는 모네는 그의 생일 전날인 1872년 11월 13일 아침 7시 35분에 이 그림을 그렸다고 추정했다. 그는 유명 작품의 시간을 추정하는 논문으로 잘 알려진 학자이다. 이 작품은 1874년 앵데팡당(Independants, 독립미술가 협회) 전에 출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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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북서부 항구 도시 르아브르(Le Havre).

모네의 발자취를 찾아 여행하던 중 내가 묵은 호텔의 방이 마침 모네가 그린 '인상, 해돋이'를 그린 르아브르 항구가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 새로 지어진 전망 좋은 곳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창가에서 여명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면한 창문에 거친 바람이 몰아친다. 모네가 새로운 시대를 자신만의 새로운 표현 방법으로 그리고 싶은 예술가로서의 열망이 강했을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본질인 창의성 아닐까.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