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도 대학병원에서”…의료공백 속 맥없는 전달체계

의료공백 상황서도 공공병원 응급·외래 가동률 대동소이
대기 길어져도 대학병원 진료 찾는 환자 발길 이어져
의료계 “의대 증원 전에 의료전달체계부터 정비해야”
정부, 보완대책 발표…중증도 따라 환자 분류

기사승인 2024-02-29 11: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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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도 대학병원에서”…의료공백 속 맥없는 전달체계
21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병원에서 환자들이 진료 시간표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전공의 집단사직 행렬이 열흘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해 공공병원이나 2차병원의 역할을 확대했지만 이들 병원을 찾는 발길이 예상보다 적다. 전문가들은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기 전에 의료전달체계부터 손봐야 한다고 짚었다. 

정부는 지난 20일 본격적인 의사 집단행동에 따라 비상대책을 가동하고, 공공병원 97곳의 응급실 운영과 일반 진료 시간을 확대하도록 했다. 전공의가 이탈한 대형병원이 감당 못하는 환자들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상급종합병원을 중심으로 응급환자 이송 및 수술 지연 사례가 빚어지는 것과 달리 수도권의 공공병원은 평소와 다름없는 진료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

29일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보래매병원의 경우 정부 지침에 따라 필수진료과인 가정의학과 외래 진료 시간을 8시까지 연장하고, 응급 수술을 대비한 대응 체계를 갖췄지만 환자 수는 큰 변화가 없는 상태다. 보라매병원 관계자는 “응급실은 최중증질환 수술을 담당하는 전문의가 부족해 많은 환자를 받고 있지는 않다”면서 “외래 환자 역시 진료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늘진 않았다”라고 말했다. 

서울적십자병원도 마찬가지다. 응급실 24시간 비상 대응 체제를 마련하고 주말까지 진료를 확대해 운영하고 있지만 예상만큼 의료 수요가 늘지 않았다. 병원 의료진 A씨는 “인근에 상급종합병원이 있어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인해 응급 환자가 많이 넘어올 것으로 봤는데 완전히 빗나갔다”면서 “상급종합병원은 여전히 환자들로 북적이며 대기시간이 길어진다고 들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공공병원에 대한 환자들의 부정적 인식이 여전히 크다고 전했다. A씨는 “전공의 사직 사태 이후 3차병원으로부터 진료가 넘겨지는 경증 환자들이 많은데, 환자 상당수가 이를 꺼리는 것으로 안다며 진료를 미루더라도 3차병원 진료를 받겠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로 3차병원은 전공의 부재로 대기 시간이 1시간 이상 걸리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진료를 보려는 환자들로 붐비고 있다. 내과 진료를 위해 이대목동병원을 방문한 김유석(71세·가명)씨는 “전공의가 없어 대기시간이 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2시간 이상 대기할 줄은 몰랐다”면서도 “진료나 검사를 받을 땐 무조건 대학병원으로 가라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복통을 호소하는 노모를 모시고 병원을 찾았다는 박현숙(50대·가명)씨도 “공공병원에 가면 진료를 빠르게 받을 순 있겠지만 기저질환이 있어 혹여 잘못 진단할까봐 불안한 마음이 있다”라며 “대학병원이 장비나 의료 기술이 더 좋을 거라고 모두가 생각하지 않나”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의료공백 사태로 인해 다시 한 번 의료전달체계의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대한병원협회의 한 임원은 “상급종합병원 쏠림 현상은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됐던 부분”이라며 “1·2·3차 진료체계를 만들어 놓고 누구나 어디든 이용할 수 있게 수가 문턱을 낮춰버리는 바람에 체계가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공공병원을 보강해봤자 이같은 체계가 정비되지 않는 이상 효율적으로 분배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정부는 의대 증원을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무너진 전달체계부터 의료계와 논의해 나가야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난 28일 오후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는 비상진료 보완대책으로 중증도에 따라 환자 분류를 시작하기로 했다. 정부는 광역응급상황실을 조기 운영해 응급 환자의 전원·이송을 신속히 조정할 방침이다. 상급종합병원은 중증 환자를 집중 치료하고, 그 외 병원은 전원된 경증 환자에게 적정 진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 수가 인상 등을 이어간다. 또 이를 뒷받침할 병원별 진료협력체계를 강화한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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