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탄압 울분에 주재소 습격한 광명시 노온사리 농민들

1919년 3월 27~28일 학생들과 합세 일제에 조직적 저항

입력 2024-03-29 10:3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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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7일 경기도 광명시 원노온사동(당시 시흥군 서면 노온사리) 주재소 인근에서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목감천 인근 마을까지 울려퍼졌다. 

열혈청년 이정석이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만세시위에 영향을 받아 이 벽지 농촌 마을에서, 그것도 주재소 앞에서 당당히 자주독립을 외친 것이다. 이정석은 노온사리에서 4㎞ 떨어진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 사는 청년이었다.

이날 시위대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 3·1만세시위를 계기로 농촌 깊숙이까지 퍼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노온사리 이정석 청년 시위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 민중의 저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노온사리 만세 사건은 이튿날 되레 본격화됐다. 주재소 순사들이 이정석을 치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자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을 위시해 최호천·윤의병(배재고보생) 이순만 등 지역 농민과 학생들이 합세해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일제 탄압 울분에 주재소 습격한 광명시 노온사리 농민들
광명시(옛 시흥군 일부) 3·1만세운동 현장 노온사리 

최호천 윤의병이 소하리 출신인 것으로 보아 이정석과 마을 친구이거나 선후배 사이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노온사리, 소하리 농민 등 200여 명이 합세했고 이들은 돌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강제 진압하려는 일제 순사들에 저항했다. 

이들은 주재소 경내까지 진입, 만세 시위했으며 게시판과 벽을 부수는 항전으로 나타났다. 이에 시흥경찰서는 시위 주동자 최호천 윤의병 등과 이종원 유지호 최정선 등 농민을 체포하고 가두었다. 

이 노온사리 시위는 당시 시흥군 최초의 만세운동이었으며 훗날 소하리 농민야학운동과 청년단체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일제 탄압 울분에 주재소 습격한 광명시 노온사리 농민들
지난 27일 광명시 독립유공자의 날 행사에서 박승원 시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그 시위 현장 노온사리는 현재 ‘원노온사동’이며 옛 흔적은 오간데 없다. 다만 주재소 옆으로 흐르던 목감천 지류만이 오염된 실개천으로 흐를 뿐이다. 시위 현장은 ‘원노온사동 노인회관’ 남쪽 일대로 추정된다. 

한편 광명시는 지난 27일 평생학습원에서 광복회 광명시지회(회장 김충한)이 주관한 ‘제3회 광명시 독립유공자의 날’ 기념 행사를 개최하고 노온사리 만세운동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날 행사는 경과보고, 감사패 전달, 축사, 만세 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박승원 광명시장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광명시 독립유공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긴다”며 “광명시 독립유공자들을 위해 힘쓰시는 광복회 광명시 지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진 학술강연회에서 양철원 학예사, 홍순대 박사, 하태철 선임연구원 등이 광명시 지역 독립운동사, 광명시의 역사적 인물과 문화유적 등을 주제로 강연해 광명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했다.

광명시는 2021년 조례를 제정해 광명시 독립운동의 시초가 된 3월 27일을 광명시 독립유공자의 날로 지정하고 2022년부터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광명=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