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신비롭게 퍼지는 현악기의 연주가 어스름한 달무리를 닮았다. 지난 24일 공개된 오케스트라 버전 ‘하루의 끝’(원곡 종현)은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으로 시작한다. 현악기 선율이 조심스레 잦아들면 부드러운 클라리넷 연주가 ‘하루의 끝’ 첫 소절을 연다. 국내 스트링 편곡 1인자로 꼽히는 영화 음악감독 박인영의 솜씨다.
박 감독은 늦은 밤 달을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하다가 드뷔시의 ‘달빛’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달빛에게 위로를 받는 하루의 끝’을 테마로 오케스트라 버전 ‘하루의 끝’을 편곡했다. 연주는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이 맡았다. 부지휘자 데이비드 이의 지휘 아래 4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호흡을 맞췄다. 음원과 함께 공개된 뮤직비디오에는 일상 속 다양한 배경에 담긴 ‘하루의 끝’ 노랫말이 등장해 여운을 남긴다.
서울시향은 어쩌다 ‘하루의 끝’을 연주하게 됐을까. 이야기는 두 달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SM엔터테인먼트는 지난 6월 서울시향과 장르간 협업을 위한 업무 계약을 맺었다. 상호 협력을 통해 K팝과 K클래식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장르를 뛰어넘은 콘텐츠를 제시해 한국 문화 콘텐츠의 발전을 이끌겠다는 포부에서다. SM엔터테인먼트는 지난달 ‘SM 클래식스’라는 레이블을 설립해 클래식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본격화했다.
‘하루의 끝’에 앞서 지난 17일 공개된 ‘빨간 맛’(원곡 레드벨벳) 오케스트라 버전은 SM엔터테인먼트와 서울시향의 첫 협업작이었다. 박 감독은 “원곡의 상큼하고 발랄한 느낌을 더욱 잘 유지하기 위해 일렉트로닉 악기를 함께 사용해 다분히 하이브리드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클래식으로의 변주가 불가능할 것 같았던 랩 부분은 현악기와 목관 악기의 협주로 재탄생했다. 글자 하나하나의 고조를 따내 화성을 강조한 덕분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K팝의 선율을 단순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K팝과 클래식을 장점을 두루 살려 원곡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박 감독은 이를 “장르의 융합”이라고 표현했다. 학부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음악을 공부하며 쌓은 박 감독의 역량이 이번 프로젝트에서 집대성됐다. 박 감독은 “클래식의 정통성과 조금은 유연하게 표현할수 있는 대중성을 잘 배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다양한 악기의 질감을 리스너들이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각 악기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들을 충분히 활용하려고 노력했다”고 귀띔했다.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융합은 해외에선 이미 익숙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록밴드 스콜피언즈와 함께 낸 음반 ‘모먼트 오브 글로리’(Moment of glory)가 대표적인 사례다. 1885년 창단된 미국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는 대중음악과 영화음악 등을 클래식 편곡으로 재해석한 음반과 공연으로 팬들을 만나왔다.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는 수석 주자가 빠지는 것 이외에는 모두 보스턴 오케스트라와 같은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다. 이같은 흐름에 맞춰 SM엔터테인먼트도 지난해 6월 미국 뉴욕 링컨센터의 초청을 받아 그룹 동방신기·소녀시대·엑소·레드벨벳 등의 히트곡을 줄리어드 음대 50인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려준 바 있다.
박 감독은 “지금은 융합의 시대”라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시도에 열려있고 관심있어 한다. 이미 해외에서는 클래식과 팝의 만남이 많이 이루어 지고 있다. 각 장르가 가지고 있는 정통성을 유지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정통성에서 조금 벗어나 장르나 악기들의 융합을 새롭게 시도한다면, 리스너들에게도 또 다른 듣는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wild37@kukinews.com / 사진=SM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