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수험생들의 대학입시 준비가 본격적으로 가열된 지난 9월28일 경기도 안양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A반(학급번호 임의 영문표기)의 3교시 과목은 영어였다. 예대 입시의 당락을 크게 좌우하지 않는 영어 수업은 하루를 멀다하고 밤을 새며 실기를 준비하는 이 학생들에게는 수면제와도 같았다.
그나마 수업에 참석한 학생수는 학급 정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5명뿐이었다. 이 학급에는 이미 예술 활동 중이거나 별도의 실기 준비로 수업에 참석하지 않은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유명 아이돌 그룹 멤버도 이 학급 소속이다. 학생들은 자습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어 교사의 마음은 조급했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수업의 속도를 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두 문제만 더 풀자. 그럼 자습 시간을 줄게.” 학생들의 수업태도는 순식간에 변했다. 학생들은 교사의 생각보다 빠르게 문제를 풀었고 곧바로 약속을 지키라고 재촉했다. 성화에 못 이긴 교사가 자습을 선언하자 학생들은 기절이라도 하듯 일제히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었다. 교사에게는 현실적인, 학생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거래인 듯했다. 하지만 교장과 학부모들의 생각은 달랐다.
교사를 위해 학부모와 대적한 학생들…“왜?”
안양예고에서 18년째 영어를 가르친 최모(여) 교사가 연극영화과 3학년A반 수업 중 학생들에게 자습을 허락한 날 학교에서는 학부모 공개수업이 진행됐다. 이 학급에는 학부모 참관이 없었지만 수업 중 학생들이 잠든 모습에 격분한 교장은 교실로 들어가 이를 지적한 뒤 수업을 마친 최 교사를 불러 경위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교장은 보름쯤 뒤인 지난 10월10일 수업 부실과 담임업무 소홀, 비인격적 언어사용 등에 대한 학부모들의 진정서 30여 건이 접수된 사실을 알리고 사퇴를 권고했다. 진정서는 최 교사의 담임 학급인 2학년B반 학생과 학부모들이 작성한 것이었다. 학교 측은 다음 날 2학년B반의 담임을 교체했다.
최 교사는 이후 한 달간 수업에만 참여하다 지난 11일 교장실을 방문한 학부모 대표 20여 명과 대면했다. 학부모 대표는 “공개수업일에도 학생들의 수면을 방관한다면 평소에는 더 심각할 것”이라며 최 교사의 사직을 요구했다. “최 교사가 사직하지 않을 경우 자녀를 전학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까지 내놨다.
최 교사는 지난 16일부터 수업에서도 제외됐지만 출근을 계속했다. 이에 학부모 단체인 ‘학교와 지역사회를 사랑하는 모임’(학사모)은 지난 23일부터 사흘간 등교시간 학교에서 플래카드를 걸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요구는 최 교사의 사퇴였다.
잠잠했던 학교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러나 교내 문제에서 교사와 학생이 대치하는 통상적 사례와 다르게 학생이 교사를 보호하기 위해 학부모에게 반기를 드는 이례적 상황이 벌어졌다. 학사모 회원들의 요구에 반발한 학생 40여 명은 시위하는 학부모들과 설전을 벌였다.
학생들은 같은 날 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최 교사의 사퇴가 부당하다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려 학사모의 입장을 정면 반박했다. 이들의 글은 한 유명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서 32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2학년생 30여 명은 지난 24일 아침 교내에서 최 교사 지지 성명을 발표했고 한 3학년생은 이번 사태를 경기도교육청에 알려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도교육청은 지난 25일부터 조사에 착수했다.
“진짜 학생을 위한 것인가” 학생들이 말하는 진실
올해 2학년B반 등 한 차례 이상 최 교사의 담임 지도를 받은 재학생들과 도교육청에 진상조사를 요구한 3학년 C학생 등을 수소문해 확인한 결과 많은 수의 학생들은 최 교사의 사퇴에 반대했다. 최 교사가 지적 받은 수업 부실에 대해서도 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C학생은 “최 선생님이 수업 시작 5분 전 교실에 먼저 들어와 노트북 컴퓨터를 설치하고 수업을 준비했다. 부실하기는커녕 고지식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평소 수업 중 수면을 방치하는 것 아니냐는 학부모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최 교사가 수업 태도를 수행평가에 반영해왔으며 잠든 학생의 경우 필기상태를 확인해 감점을 면해주는 등 철저한 기준을 두고 관리했다고 C학생은 설명했다.
최 교사의 담임업무 소홀에 대한 진정서를 작성한 2학년B반에도 학부모들과의 입장차를 드러낸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이 학급의 D학생은 “최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가진 급우가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며 “학부모님들은 교실로 찾아와 학생들에게 불만을 적으라고 한 뒤 이를 교장 선생님께 제출했다”고 말했다.
2학년 E학생은 “학교 측과 학사모가 요구하는 최 선생님의 사퇴가 진짜 학생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최 선생님의 문제점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해도 학교 측의 해고 과정은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 교사는 안양의 한 신경외과에 입원했다 지난 30일 아침 퇴원, 학교로 다시 출근했다. 퇴원 하루 전 병실에서 만난 그는 “일련의 사태를 납득하기 어렵다. 학교와 학부모들께서 문제를 제기한다면 교사로서 수렴하고 개선하는 게 우선이다. 그게 상식적인 과정이다”라면서도 “나를 돕겠다는 학생들에게 고맙지만 해를 끼칠까 우려된다. 어린 나이에 몰라도 될 것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학부모의 입장이라면…” 교장이 말하는 상식
한국의 교육 환경 상 교내 문제는 다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학교 관리자와 학부모들의 입장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관리자의 경우 여론으로부터 이해를 받는 학부모들과 다르게 악역을 맡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29일 학교에서 만난 최모(여) 교장은 최 교사의 사퇴를 권고한 이유를 설명하고 악화된 여론에 대한 심경을 토로했다.
최 교장은 “이번 사태가 단지 학부모 공개수업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지난 9월 수업 부실 민원이 교장실로 접수되는 등 이미 최 교사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신이 커졌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며 “특히 최 교사의 경우 개교 이래 처음으로 수업 부실과 담임업무 소홀에 대한 민원이 동시에 들어왔다”고 밝혔다.
이어 “학부모와 학생들이 제기하는 교사에 대한 민원을 모두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관리자라면 학부모와 학생의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교권을 지킬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교사가 신뢰를 잃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아이를 맡긴 부모의 입장에서 교육자를 불신한다면 교육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예고에서도 실기가 아닌 수능으로 명문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과거부터 있었고, 현재의 경우에는 모든 예고 수험생들에게 수능 시험 성적이 요구되는 상황”이라며 “이런 변화에 따라 국어와 영어, 사회 등 일반 과목 수업에 대한 예고 학부모들의 관심도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최 교장은 이번 사태에 대한 인터넷 게시물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해 “그런 일은 전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학부모들부터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해 학부모들이 교내 부조리를 방관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강변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 트위터@kco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