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연세대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6·10 민주항쟁에 불을 지피고 떠난 고(故) 이한열(경영 86학번)씨를 추모하기 위해 후배들이 지난 3일부터 교내 학생회관에 설치한 분향소 향로 안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됐기 때문이죠. 1980년대 민주화의 상징인 이 열사를 누군가 악의적으로 모욕했다고 판단한 총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는 이 사실을 즉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알렸고 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습니다.
“실수인가 모욕인가… 혹시 이번에도?”
연세대 동아리연합회는 지난 4일 SNS 페이스북에 “오늘 고 이한열 열사의 분향소를 정비하다 충격적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학생회관 1층 로비에 설치한 향로에 누군가 담배를 꺼놓았습니다. 두 개비씩이나. 대한민국에서 재떨이와 향로를 구분할 줄 모르는 몰상식한 사람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분개를 금할 수 없지만 일단 참겠습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사건입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사진 한 장도 공개했습니다. 사진에는 필터만 남은 두 개비의 담배꽁초가 타고 남은 향 조각들을 비집고 향로 속에 놓인 정황이 담겼습니다. 금속 재질인 향로 상단에는 담뱃불을 끈 것처럼 동그랗고 붉게 그을린 자국도 남았죠. 누군가 실수든 고의든 담배를 피우고 향로에 버렸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사진이었습니다.
이 열사는 1987년 6월9일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 과정에서 머리에 최루탄 파편을 맞고 사망한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사건 다음 날인 10일부터 20여 일 간 전국에서 500만 명이 항쟁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20일 뒤 6·29선언이 나왔습니다.
네티즌들은 향로 속 담배꽁초를 민주화의 상징에 대한 테러로 간주했습니다. SNS에는 “이념을 떠나 무례한 행동”이라는 점잖은 의견부터 “장본인을 찾아 담뱃불 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격한 의견까지 다양한 형태의 분노가 쏟아졌습니다. 한 네티즌(@kojus*****)은 “이 열사를 죽인 방식과 비슷한 테러다. 역사는 이렇게 반복된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지난달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모욕했다 여론의 역풍을 맞은 보수성향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를 겨냥한 발언도 나왔습니다. 일베 회원들이 이번 사건의 배후라고 확신한 일부 네티즌들은 “연세대 학생들 가운데 일베 회원이 있다”거나 “이번 사건은 표현의 자유 논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힐난을 퍼부었습니다.
연세대 총학 “추모의 담배, 말해도 안 믿으니 답답”
향로 속 담배꽁초는 하지만 테러나 모욕이 아니었습니다. 시민 두 명이 이 열사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아 향 대신 담배에 불을 붙여 향로 안에 꽂았다는 게 연세대 총학생회의 설명입니다.
고은천(토목환경공학 10학번) 총학생회장은 5일 전화통화에서 “다시 확인하니 향로 속에는 담배 모양 그대로 타들어가 길게 놓인 재가 있었다. 분향소를 정면으로 촬영한 CCTV가 없어 문제의 인물을 즉시 포착하지 못했지만 누군가 향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오늘 시민 두 명이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추모의 의미로 한 행동이라고 해명했고, 이런 사실을 SNS에 알렸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동아리연합회는 이날 오후 페이스북을 통해 “한 언론의 보도를 접한 시민 두 명이 총학생회로 전화를 걸어 전후사정을 밝혔습니다. 우리의 분개가 단순한 오해로 밝혀져 다행입니다. 분향소 관리에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라고 알렸습니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학생회 측의 설명과 동아리연합회의 페이스북 글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거짓이라고 주장하면서 “시민 두 명의 실체를 밝히고 직접 사과하게 하라”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했죠. 향로 속 담배꽁초를 테러로 오해한 사람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 합니다. 총학생회만 곤란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해당 시민 두 명이 총학생회 측에 신변 보호를 간곡하게 부탁했기 때문이죠.
고 총학생회장은 국민일보 쿠키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정말 난처하다. 그 분들께 직접 해명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신분을 노출하고 싶지 않다고 부탁했다. 언론사와 일부 사람들이 해당 시민 두 명과 접촉하고 싶다고 요청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 시민 두 명이 선의로 향로 속에 담뱃불을 피웠다는 사실만큼은 꼭 믿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아직도 믿기 어렵나요. 고 회장의 간곡한 부탁을 봐서라도 한 번 믿어보는 건 어떨까요. 이틀간 엉뚱하게 흘러간 상황을 가슴 졸이며 지켜봤을 두 명의 시민도 앞으로는 건강에 해로운 담배 대신 꽃을 영전에 바쳐보길 바랍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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