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스포츠] 펠레(73·브라질)는 머뭇거렸다. 원하지 않은 질문을 받은 듯 표정은 어두웠다.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만연했던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적은 3초 가까이 흘렀다. 펠레는 한 차례 말을 더듬더니 질문을 건넨 진행자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브라질이 결승전에 진출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난 7일 브라질 바이아주 코스타도사우이페에서 열린 2014년 브라질월드컵 본선 조 추첨식에서 펠레는 조국의 결승 진출을 전망했다. 조 추첨식의 진행자인 페르난다 리마(36)에게서 받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세계 축구계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징크스 가운데 하나인 ‘펠레의 저주(The Curse of Pele)’를 의식한 반응이 지구촌 곳곳에서 쏟아졌다.
각국의 인터넷 매체는 조 추첨 시작 전에 나온 펠레의 발언을 앞세워 브라질의 결승 진출 실패를 예상하는 흥밋거리 수준의 기사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브라질 네티즌의 탄식과 나머지 본선 진출 31개국 네티즌의 환호가 엇갈렸다. 일부 브라질 네티즌들은 질문한 리마와 대답한 펠레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월드컵 때마다 우승국 질문으로 홍역을 치른 펠레는 2분여의 짧은 출연시간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무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펠레는 세계 축구계에서 유일하게 ‘황제’ 칭호를 얻은 슈퍼스타다. 하지만 월드컵 우승 판세를 내다보는 통찰력은 이런 명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반세기 가까이 거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국을 맞추지 못했다.
펠레는 현역 선수로 출전한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는 조국의 우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사상 최악의 성적(1승2패)으로 탈락했다.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에서는 독일과 페루를 우승 후보로 거론했지만 두 팀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잉글랜드, 프랑스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우루과이가 펠레로부터 우승 후보라는 찬사를 듣고 결승 무대를 밟지 못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는 펠레가 우승 후보로 가리킨 콜롬비아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자책골을 넣은 수비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펠레가 콜롬비아와 함께 거론한 독일은 8강에서 탈락했고, 우승 가능성이 없다고 전망한 브라질은 월드컵을 들어올렸다.
징크스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부터 우승 후보를 넘어 대회 전반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펠레는 아프리카의 선전을 예상했지만 나이지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4개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펠레가 우승 후보로 꼽은 브라질과 스페인은 각각 결승전과 조별리그에서 좌절했다.
한국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펠레의 저주’를 경험했다. 펠레는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스페인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4강까지 오른 한국을 향해 “결승전까지 오를 만하다”고 극찬했지만 한국은 준결승전에서 독일에 무릎을 꿇었다. 다른 대회와 마찬가지로 펠레가 우승 후보로 지목한 프랑스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조별리그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 브라질이 우승했다. 펠레는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도 한국의 16강 진출을 전망했으나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펠레의 저주’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풀렸다. 우승 후보로 지목을 받은 스페인이 사상 첫 월드컵 정상을 밟으며 징크스를 깨뜨렸다. 펠레는 그러나 지난 6월 국제축구연맹(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선전을 예상한 일본이 3전 전패로 탈락하는 등 여전히 각 대회마다 빗나간 분석으로 오명을 이어왔다.
이번 월드컵 조 추첨식 이후 세계 축구팬의 시선이 또 한 번 펠레의 입으로 모아진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19일 SNS의 축구팬은 “개막일까지 남은 6개월간 펠레에게 어떤 질문도 해서는 안 된다”거나 “펠레는 묻지 않은 우승 판세를 거론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일부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펠레가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거론할 우승 후보를 예상하는 격론 벌어지기도 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