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한·일월드컵 8강전이 열린 2002년 6월 2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 스페인과 득점 없이 비기고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우리나라의 첫 번째 키커는 맏형 황선홍(46)이었습니다. 황선홍의 오른발 슛은 스페인 골키퍼 이케르 카시아스(33)의 몸통과 팔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뚫고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맏형의 성공은 동생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었습니다. 후속 키커인 박지성(33)·설기현(35)·안정환(38)이 모두 골을 넣었습니다. 마지막은 주장 홍명보(45)였습니다. 홍명보가 골문 상단을 노려 강하게 때린 오른발 슛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린 카시아스를 뒤로 한 채 골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진출한 순간이었습니다. 12년이 지났지만 그날을 생각하면 전율을 느끼는 축구팬이 많습니다. 스페인과의 승부차기 순서는 1990~2000년대 한국 축구의 시작과 끝을 보여준 상징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전방에는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황선홍이, 최후방에는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가 있었습니다.
17일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의 축구팬들을 중심으로 황선홍의 ‘대표팀 감독론’이 불거진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지난 10일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 홍명보와 같은 시대를 선수로 지낸 황선홍에게 시선이 돌아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겁니다. 더욱이 황선홍은 지난해 프로축구 K리그와 대한축구협회(FA)컵을 석권한 ‘디펜딩 챔피언’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입니다. 포항은 올 시즌에도 리그 선두입니다.
황선홍이 수면 위로 떠오르긴 했지만 반대 여론도 많습니다. 2007년부터 7년간 허정무(59)·조광래(60)·최강희(55)·홍명보가 차례로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생긴 국내파 지도자에 대한 불신의 영향이 큽니다. 해외파 감독을 선임하자는 주장이죠.
하지만 축구팬 사이에서는 다른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황선홍까지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인터넷에서는 “우리나라 지도자를 모두 사라지게 할 셈인가” “황선홍은 최후의 카드로 남겨야 한다”는 의견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팀 감독은 ‘독이 든 성배’로 비유됩니다. 선수생활을 은퇴하고 지도자 길로 나선 감독에게는 최고의 영예지만 무거운 책임이 따릅니다. ‘황선홍 대표팀 감독’을 반대하는 여론이 불거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명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홍명보와 월드컵에 열광하면서도 K리그 경기당 관중 8000명에 이르지 못하는 한국 축구의 현실이 반대 여론 속에 담겨 있습니다. 황선홍은 독이 든 성배를 집어들까요?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