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유휴열의 작품을 본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生·놀이 4346-Ⅰ(2012~2013년)'라는 제목이 붙은 '生·놀이' 연작 가운데 하나였다. 노트북의 모니터를 통해서였지만 느낌은 생생했다.
작가는 색시공(色是空), 공시색을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쉽게 자유와 해탈을 말하지 않았다.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다분히 불교적 관조의 세계를 그리는 듯하면서도 도사연, 한소식 한 양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 (조울을 반복하는) 내 삶이 보였다. 그래서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좋았다.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편안했다. 세계란 본디 그런 곳이라고, 일찍이 부처가 일러주지 않았던가. 그것이 화엄(華嚴)이다.
화엄의 연화장 세계는 열반락을 누리는 곳이 아니다. 현상과 본질, 현상과 현상이 부딪치면서도 융합하여 약동하는 생명의 세계. 그것이 화엄이다. 유휴열의 그림 속에는 억겁에 걸친 우리의 '카르마(業)'가 고스란하고, 그러면서도 약동하는 원초적 생명 의지가 시냇물처럼 또는 장강처럼 흐른다. 유휴열은 그것을 '生·놀이'라고 믿는 듯하다.
나는 유휴열의 '生·놀이'의 세계를, '삶은 곧 놀이고 놀이는 곧 삶'이라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삶은 그 자체로 노역이기도 하다. 별빛에 취해 풀밭을 걷다가 남이 싸 놓은 똥을 밟는 일이 또한 삶이다. 유휴열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놀이'라니. 동토를 뚫고 솟아오르는 봄풀의 환희 용약. 이 생명의 기운을 '놀이' 말고 달리 무어라 할 것인가.
'세계일화' 연작도 화엄의 다른 표현이다. 유휴열의 세계일화는 꽃 만발한 세계가 아니다. 만물의 생로병사, 인간의 희로애락이 거기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한 꽃', 그것이 화엄의 세계다.
빛―유휴열이 그리는 세계의 궁극
유휴열은 요즘 '生·놀이' 작업에 집중하며 '노는' 듯하다. '生·놀이'로 펼쳐 보이는 유휴열의 세계관은 발랄하되 가볍지 않고, 밝되 경박하지 않다. 그의 '生·놀이'를 보면 평등의 극치를 보이는 다락논의 논둑이 보이고, 구름이 보이고, 아이들의 색동옷이 보이고, 꽃상여와 만장이 보이고, 카르마의 사슬(共業) 같은 거미줄이 보이고, 마을의 생명줄인 우물이 보이고 병원에서 유일하게 활짝 웃는 갓난아기의 울음이 보인다. 그리하여 '生·놀이'다.
유휴열은 이 모든 것을 '일소'처럼 해 냈다. 그는 기꺼이 자기 작품의 도구가 되었다. 그는 작품의 상당 부분을 우연에 맡긴다.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삶이 그러하니까. 그래서 '놀이'다.
아직 나는 유휴열의 작품이 전시된 금보성아트센터를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만든 빛의 울림이 어떠할지를. 모악재에서 본 그의 작품들은 시선을 따라 다르게 보였다. 그는 작품의 완성을 '빛'과 '보는 사람'의 몫으로 돌려놓았다. 유휴열이 구현한 '生·놀이'는 시니피앙이다. 시니피에는 빛과 보는 사람이 만든다. 빛은 자연의 총체다. 세계의 실상이다. 유휴열은 빛의 사제이고 보살이다.
조규봉 기자 ckb@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