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장윤형 기자 ] 50대 직장인 A씨는 시도 때도 없이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가끔은 자살충동을 느낄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울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열심히 일만 했다는 그였다. 50대 초입에 들어서자 기상시간만 되도 출근이 하기 싫어 아내에게 짜증을 내기 일쑤다. 회사에 가면 직장 동료들과도 갈등이 잦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 변화가 일어나, 부하 직원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낸다. 잦은 술과 흡연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도무지 감정을 통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유씨는 아내의 손에 붙들려, 병원을 찾았다. 그에게 내려진 진단은 ‘우울증’이었다.
여성에게만 ‘갱년기’ 우울증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중년 남성에게도 호르몬 변화에 따른 갱년기 증상의 일종으로 우울증이 찾아온다. 그동안 폐경 시기의 중년 여성들의 갱년기에만 초점이 맞춰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남성에게도 일종의 갱년기 증상으로 우울증이 찾아오지만, 자각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여성들의 경우 생리·임신·출산·수유 등의 생애주기별로 여성호르몬의 변화에 따라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으로 짐작된다. 중년이 되면 폐경으로 인해 눈에 띄는 신체적 변화가 생긴다. 이에 따라 호르몬 감소에 따른 감정 변화를 인지하기 마련이다. 이때 갱년기 우울증이 함께 찾아온다.
반면 남성은 눈에 띄는 호르몬 변화가 없다. 다만 이 호르몬은 30대 후반에 정점에 이른 뒤 해마다 약 2∼3%씩 감소한다. 실제 남성이 중년이 접어드는 40∼50세 시기에 약 10%, 60∼80세 남성의 20%는 혈중 남성호르몬이 정상치 미만까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해란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남성의 경우 테스토스테론과 같은 호르몬이 서서히 줄어들기 때문에 급격한 신체 변화는 없다. 때문에 남성의 경우 갱년기 우울증을 ‘사회적’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남성은 ‘사회적 위치’ 변화에 따르는 심적 변화가 큰 요인이라는 것이다. 나 교수는 “갱년기 중년 남성의 우울증은 사회적 위치 변화에 따른 불안감이 동기가 돼 나타나는 일종의 ‘상실감(loss)’에 초점을 맞춰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남성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떨어질 위험이나 불안감이 커질 때 우울증을 경험하는 비율이 높다. 나 교수는 “대체적으로 중년 남성은 가정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불안감과 압박감이 합쳐져 우울증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는 근거가 있다. 실제 연세대 보건대학원 박소희 교수팀이 정부의 한국복지패널조사(2008∼2011년)에 응한 7368명을 대상으로 고용상태 변화와 우울증의 상관성을 살핀 결과에 따르면, 정년 퇴직ㆍ해고 등 정규직에서 실업으로 바뀐 사람의 우울증 발생 위험이 1.78배로 높았다. 특히 고용 형태의 변화가 남성 가구주에겐 우울증 발생 위험을 최고 2.7배까지 높였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지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우울증이 발병하는 중년 남성이 늘기 마련이다. 나해란 교수는 “중년 시기에 찾아오는 상실감은 누구나 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며 “이를 거부하기보다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