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가 질적·양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풍족한 인프라라는 밑거름이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두꺼운 지지층과 폭넓은 참여 저변이 있어야 한다. e스포츠에서도 통용되는 얘기다.
국내 리그 오브 레전드(LoL)계에서 최고 권위를 갖는 대회는 프로게이머의 각축장인 챔피언스 리그(롤챔스)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가 곧 축구가 아니고 메이저리그가 곧 야구가 아니듯 롤챔스가 곧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조기축구와 동아리야구 또한 스포츠 종목의 일부분이듯 LoL에서도 아마추어 리그가 제 몫을 한다. 직장인을 위한 리그, 대학생을 위한 리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곳에는 와드·방호 손가락 콤보가 안 되는 ‘피넛’과, 반대 의미로 예측 불가 플레이를 펼치는 ‘페이커’가 즐비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 상대를 맞이하는 태도만큼은 진짜배기 못잖게 진지하다. 아마추어에게는 아마추어 나름의 투쟁심과 목표의식이 있다.
나이스게임TV가 주최하는 레이디스 리그도 그런 대회 중 하나다. 레이디스 리그는 여성만을 위한 대회다. 여느 아마추어 대회가 그렇듯, e스포츠 참여 계층을 폭넓게 만든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남초 현상이 두드러지는 게임·e스포츠 시장에서 여성 아마추어 유저들도 충분히 e스포츠 문화를 향유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실버·브론즈 티어 유저들만 참가 가능한 실버·브론즈 토너먼트는 게임을 못해도 충분히 즐겁게, 열정적으로 e스포츠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취지가 녹아있다.
레이디스 리그 실버·브론즈 토너먼트의 총상금은 100만 원에 불과하다. 우승 상금은 50만 원이다. 일확천금을 벌기 위해 참가하는 대회가 아니다. 우승에 공헌해도 세계 최고 미드로 인정받지 못하니 명예를 위한 대회도 아니다. 그저 실론즈(실버·브론즈) 티어, 다른 말로 하면 보통의 유저들도 e스포츠 문화를 마음껏 즐기자는 멋진 의도로 만들어진 그런 아마추어 대회다.
하지만 이런 레이디스 리그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유독 대리 게임과 관련한 구설수에 휩싸이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리디스 리그’라는 비꼼도 듣는다. 좋은 취지로 시작한 대회가 본의 아니게 대리 게이머 거름망 역할까지 하고 있는 셈이니 시쳇말로 ‘웃픈’ 일이다. 주최 측은 대리 게이머의 참가를 미연에 방지한다고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작정하고 속이는 부류까지 막아낼 도리는 없다. 대다수 선량한 참가자는 뒤집어 쓴 오명이 억울할 따름이다.
티어가 낮아도, 실력이 부족해도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게임에 미칠 수 있고 열정을 쏟을 수 있다. 그게 바람직한 스포츠 문화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그 오만한 손가락으로 다른 유저를 희롱하는 이들에게는 마우스를 쥘 자격이 없다. 스포츠 정신은 페어플레이에 기반을 둔다. 초등교육 과정에서 배우는 내용이다. 아마추어 리그 또한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자리다. 불쾌한 기억이 되어선 안 된다.
지난 한 해 동안 업계는 종목을 불문하고 대리 게이머 문제로 시끄러웠다. 앞으로는 더 시끄러울 것이다. 시끄러워야 한다. 대리 게이머 근절은 e스포츠가 한 걸음 더 발전하기 위해서, 한층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아마추어 리그의 대리 게이머들도 소탕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순 없다. 일반 유저의 인식 개선을 위해서는 더욱 심혈을 기울여 청산해야 할 대상일 수도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업계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적발된 이들에겐 일벌백계가 뒤따라야 한다. 내실을 다지는 것, 덩치 키우기보다 중요한 일이다.
윤민섭 기자 yoonminseop@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