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예술계 성추행, 권력관계가 주는 2차 가해… "고발 뒤에는 이미 늦다"

대중예술계 성추행, 권력관계가 주는 2차 가해… "고발 뒤에는 이미 늦다"

기사승인 2018-02-15 07:00:00


A씨는 연극계에서 일하는 스태프다. 학생 시절 본 한 연극이 A씨가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A씨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한 극단에 면접을 봤고, 합격했다. 그리고 첫 출근을 한 날, A씨를 환영하는 회식에서 극단의 남자 배우 B씨가 말했다. “A씨는 여배우들보다 더 다리가 예쁘다. 너희들 다 반성해. 스태프들보다 여배우가 다리가 굵으면 쓰냐.”

여배우들은 고개를 돌렸고, A씨는 그 회식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을 환영하는 회식인데,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B씨를 슬그머니 쳐다보니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들기 바빴다.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 같았지만 망설이는 사이에 시간이 흘렀고 회식이 끝났다. A씨는 망설이다 결국 집에 가는 길에 B씨를 붙들고 “사과해 달라”고 말했다. B씨는 A씨에게 “칭찬한 건데, 왜 사과를 하냐”며 도리어 A씨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C씨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스태프다. 운 좋게 학교 선배 덕분에 제법 큰 상업 영화 연출부에 막내 스태프로 합류할 수 있었다. 지방 촬영이 많아 C씨는 해당 영화의 회차가 진행되는 동안 꼬박 스태프들 숙소에서 지냈다. 영화 촬영이 일찍 끝난 날, 스태프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프로듀서가 C씨에게 말했다. “남자친구가 없으면 술 먹고 취한 척 (숙소의)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 다른 사람이 말을 얹었다. “잘 하면 시집도 갈 수 있어.” 모두 웃었지만 C씨의 기분은 편치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을 표시하면 자신에게 자리를 소개해 준 학교 선배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 것 같았다. 그래서 C씨도 결국 웃고 잊어버리려 애썼다. 몇 년이 지났지만 C씨는 아직도 그 때를 잊지 못한다.

‘연애담’으로 각종 영화시상식에서 상을 거머쥔 이현주 감독은 최근 유사준강간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2015년 술에 만취해 의식을 잃은 스태프를 인근 숙박업소에서 성폭행한것. 2년여의 재판 끝에 대법원은 유사준강간 혐의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현주 감독은 청룡영화제 신인감독상과 여성영화인 축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전도 유명한 신예 감독으로 주목받았다. 대법원 선고가 크게 회자된 이후에도 여전히 몇몇 협회에서는 이현주 감독을 제명하지 않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최근 한 연극계 스태프는 SNS를 통해 배우 이명행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을 게재했다. 결국 이명행은 자신이 출연중이던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하차한 후 소속사의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그러나 정작 ‘거미여인의 키스’측은 이명행의 하차 공지에 관해 왜 그가 하차하는지에 대해서는 게재하지 않아 일부 관객은 여전히 이명행의 성추행 사실을 모르고 있다.

지난 가을 최영미 시인은 한 문예지의 페미니즘 특집에 ‘괴물’이라는 시를 기고했다. 해당 시에 등장하는 ‘EN 시인’이 매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목되는 고은 시인이라는 지적이 줄을 이으며 문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몇몇 문인이 “고은 시인의 성추행은 고질적인 일이었는데, 이제 와 새삼스럽게 지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며 “문학계에 안 좋은 이미지를 씌우지 말라”고 불편함을 표했으나 류근 시인은 “눈앞에서 보고도, 귀로 듣고도 모른 척한 연놈들은 다 공범이고 주범”이라 비판했다.

■ ‘미투’ 운동 이전에 ‘00계 성추행’ 있었다… 권력형 성추행 만연

서지현 검사의 법조계 성추행 고백 이후 ‘미투 운동’은 거세게 일어났다. 침묵하고 있던 피해자들이 앞다퉈 자신이 당한 일을 전했고, 가해자에게 사죄와 반성을 요구했다. 그 이전에는 ‘00계 성추행 고발’이 있었다. 이른바 권력형 성추행이다.

앞의 다섯 가지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다. 지난해 SNS 상에서 일어난 ‘00계 성추행’ 해시태그에는 유독 문화예술계가 많았다. 연극계, 영화계, 문학계, 미술계, 음악계를 불문하고 수천 개의 성범죄 고발이 일어났다. A씨는 “배우와 스태프 사이의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 때문에 더욱 말하지 못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통상적으로 연극 무대에 서야 하는 배우들은 ‘스태프들이 받들어줘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경우가 잦고, 무대 바깥에서도 이런 인식들이 이어진다는 것. A씨의 경우는 더욱 악질이다. 외모 비하는 남자 배우보다 여배우들에게 훨씬 잦게 일어나는 일이며, B씨는 외모 비하와 성추행을 결합해 A씨와 여배우들에게 동시에 언어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C씨의 경우도 자신과 학연으로 연결된 선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양성돼있는 도제 방식이 권력형 성추행과 결합하는 순간,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성추행들을 목격한 사람들은 어떨까. 놀랍게도 대부분의 목격자들은 이를 방치한다. ‘00계 성추행’ 해시태그에서 고발자들이 토로하는 고통은 대부분 비슷하다. 자신이 당한 일들에 관해 주변인들이 오히려 “영광인 줄 알라”라고 말하는 등 당연히 여겼기에 당시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권력형 성추행이 타인들의 방관과 결합해 더욱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다. 목격자들의 방조 혹은 첨언은 2차 가해로 변해 피해자들의 상처를 후벼판다.

■ “개선책? 여타 범죄와 같다… 피해자 아닌 가해자가 반성·예방해야”

문화예술계 성추행 사실이 불거진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이 중 제작자나 가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들의 불매운동이다. 곧바로 티가 나지 않아 느리고 둔한 방식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타격이 가장 크다. 예를 들면 2017년 6월 ‘호식이두마리치킨’의 최호식 회장이 직원을 성추행한 사건이 불거진 이후 ‘호식이두마리치킨’은 매출이 40%나 급감하는 등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문제는 문화예술계의 경우 소비자들의 능동적 불매가 거의 불가능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연극이나 영화는 제작자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캐스팅 혹은 고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배우 이경영·송영창은 2002년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브라운관 복귀만 하지 않았을 뿐, 스크린에서는 맹렬히 활동 중이다. 이경영의 경우 영화 관객들 사이에서 “이경영이 나오지 않는 한국 영화가 없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활발히 활동 중이며, 송영창은 최근 영화 ‘남한산성’ ‘부라더’ ‘해빙’ 등에 출연했다. 가수 이수 역시 2009년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중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으나 지난해 5월 새 앨범을 발매하고 활동에 나섰다. 대중의 호불호에 상관없이 제작자들이 이들을 쓰는 이상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가해자들이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모범적인 해결책이자 문화예술인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사건을 고발한 다음에는 이미 늦다. 고은 시인이, 이명행이, 이현주 감독이 고발되는 현실 뒤에는 수많은 A씨와 B씨, C씨가 오늘도 존재한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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