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의 내부 폭로에서 시작된 ‘미투’운동이 대중예술계로 번지며, 대중예술계는 숨가쁜 일주일을 보냈다. 이윤택, 조재현, 조민기, 오달수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예술인들이 성추행 사실에 관해 시인하며 대중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익명의 SNS에서 실명 SNS로, 익명 인터뷰에서 실명 영상 인터뷰로. 가해자들이 자신의 범죄사실을 부인할수록 피해자들은 더욱 큰 목소리를 냈다.
지난 27일 JTBC ‘뉴스룸’에서 인터뷰를 자처한 배우 엄지영씨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2000년 초반, 부산에서 연희단 사람들과 함께 오달수를 만났고 2003년 서울 오디션이 열리자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자기가 얼굴이 팔려 있어 부끄럽다며 들어가자고 한 곳이 모텔이었다"고 말한 엄지영씨는 "이혼해서 집이 없고 그곳이 숙소라고 했다.머뭇거리니까 ‘네가 자꾸 그러니까 내가 좀 그렇잖아’라고 해서 결국 따라 들어갔고 성추행을 당했다. ‘편하게 이야기하자’며 ‘더운데 씻자’고 하면서 옷을 벗겨주려고 내 몸에 손을 댔다. 화장실에서도 계속 그러려고 하길래 도망쳐서 큰 일은 피했다”고 자세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성추행 피해자로서 자세하게 상황 설명까지 해가며 나선 이유는 하나였다. 오달수의 사과는 영영 없었던 것이다. 2003년 사건이 일어난 후 2018년. 15년이 흐를 동안 오달수는 단 한 번도 엄지영씨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미투 운동’으로 오달수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을 만든 것이 밝혀졌을 때도, 오달수는 법적 대응만 시사했을 뿐 사과하지 않았다. 엄지영씨는 “난 입시학원에서 연기를 가르친다. 아이들이 연극영화과 가서 열심히 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나와 같은 일을 당할까 안타까웠다. 내 이름을 공개 안 하면 나 역시 없었던 일이 될까 봐 두려웠다.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해서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다른 피해자들 실명은 몰라도 들은 얘기가 많다. 분명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엄지영은 "미안하고 힘든 일이다. 더 나와줬으면 좋겠다. 오달수가 내 기억에는 없고 증거도 없으니, 그래서 없었던 일이야 하는 걸 막았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오달수는 결국 28일 자필 사과문을 게재했다. “확인하고 싶었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했다. 당시 이러한 심정을 올리지 못하고 그저 그런 적이 결코 없다고 입장을 밝힌 점 어떤 비난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오달수는 “제 행동으로 인해 2차 3차 피해를 겪고, 겪게 될 모든 분들께 깊이 사죄드린다. 그동안 제가 받기 과분할 정도로 많은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께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드렸다”고 밝혔다. 당초 처음 성추행 의혹이 제기됐을 당시 강력 부인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자세다.
이같은 행동은 이윤택과 조재현 혹은 조민기 또한 마찬가지다. 세 사람 모두 당초 성추행-성폭행 의혹에 관해 부인했으나 이후 피해자들이 실명 인터뷰에 나서며 상황이 반전됐다. 이윤택은 기자회견을, 조재현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숙하겠다고 밝혔으며, 조민기는 현재 형사 입건됐다.
언뜻 보면 범죄자들이 당연한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중들이 이 사례들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피해자의 얼굴과 실명을 밝히는 인터뷰만이 사실이고 절대적으로 존중돼야 하는 가치로 취급하는 자세다.
네 사람의 태도가 더욱 큰 비난을 받는 이유는, 피해자들이 익명 뒤에 숨어있을 때는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성 관련 범죄 피해자들은 얼굴을 드러내고 피해사실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다. 오달수의 사례만 봐도 투명하다. ‘연애 감정이 있었다’는 오달수의 변명 비슷한 사과문에 몇몇 네티즌들은 기사 댓글로 엄지영씨에 관해 단순 연애사건을 부풀린 것 아니냐고 추측하며 인신모독성 발언을 쏟아냈다. 성범죄는 특성상 가장 내밀한 곳, 혹은 외부인의 개입이 쉽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분명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하는데도, 사건의 성격 때문에 범죄 피해가 없던 일인 양 취급되는 일이 수두룩한 것이다.
네 사람도 이같은 대중의 선입견을 이용해 익명 제보를 모두 부인하고, 무고죄까지 시사했다. 결국 피해자들은 2차 가해를 각오하고 실명과 얼굴을 드러냈다. 사과는 받았으나 2차 가해가 시작됐다. ‘뉴스룸’에서 눈물 흘리던 엄지영씨는 용기를 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실시간으로 2차 가해를 당하고 있다. 얼굴 평가와 욕설, 인신공격과 모독. 대중들은 ‘얼마나 억울하면 실명으로 인터뷰를 했겠느냐’고 말하지만 이 말에는 ‘정 억울하면 2차 가해를 각오하고서라도 너를 드러내라’라는 함정이 있다. 피해자가 피해를 각오해야 범죄를 고발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실명 인터뷰만을 진정성을 띤 폭로로 취급하는 자세는 지양돼야 한다. 대중의 시선이 집중돼야 하는 것은 가해자의 처벌과 진정한 반성이지, 피해자의 신상명세가 아니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