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17일 오후 1시18분.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고(故) 염호석 양산분회장이 강원도 강릉 모 처에 주차한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승용차 안에는 염 분회장이 작성한 유서가 있었다.
이 유서에는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다"며 "나 하나로 인해 지회가 승리하기를 기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유서 마지막에 "(저의)시신을 찾게 되면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 달라"며 "지회가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해 이곳(정동진)에 뿌려 달라"고 적었다.
그는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수리기사로 일했지만, 정작 삼성전자서비스 소속이 아니었다.
이 같은 사정은 염 분회장만이 아니었다. 현장 수리기사 모두가 그랬다.
이들은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뭉쳤고, 그 결과 2013년 7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처음 설립됐다.
염 분회장이 있던 양산분회는 노조 투쟁에 있어 전국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었던 곳이었고, 그는 양산분회를 이끌던 분회장이었다.
◇노조장(葬)에서 가족장으로 왜?
그래서였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마지막 가는 길마저도 순탄치 못했다.
노조는 염 분회장의 희생을 기리며 장례를 노조장(葬)으로 치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이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나섰다.
노조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했지만, 염 분회장의 장례는 결국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그런데 그가 숨진 지 5년여 가 지난 지금 가족장으로 치르게 된 전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염 분회장의 시신을 탈취하는 과정에 경찰이 깊숙이 개입했고, 경찰은 삼성 측에서 뒷돈을 받았던 사실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낱낱이 밝혀지고 있다.
삼성 측은 염 분회장 사망 후 이를 계기로 노조 투쟁이 더 강경해질 것을 우려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염 분회장의 장례를 노조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빨리 치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삼성 측은 염 분회장이 살았던 곳의 정보 경찰관 A씨, B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A씨는 당시 양산경찰서 정보과장이었고, B씨는 같은 경찰서 정보계장이었다.
A씨는 아들의 시신을 아직 보지 못한 염 분회장의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유서 내용을 알리지도 않았다.
A씨는 ‘가족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하라’고 B씨 등 정보관 3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B씨는 염 분회장이 속해 있던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사장과 함께 염 분회장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가족장으로 치르는 것으로 합의하면 보상하겠다. 돈 많이 받고 합의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염 분회장의 아버지는 아들 유서에 따라 노조에 장례 절차를 위임하기로 했다.
B씨는 사측으로부터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는 지인을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에 염 분회장 후배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사측은 숨진 염 분회장이 발견된 다음날 오전 11시10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염 분회장 아버지를 만나 “합의금 6억원을 줄 테니 가족장으로 치러 달라”고 제안했다.
이 자리에서 합의서가 작성됐고, 염 분회장의 장례는 노조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됐다.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노조는 염 분회장을 추모하는 촛불문화제를 시신이 안치돼 있는 장례식장에서 열기로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찰이 나섰다.
A씨가 상주인 염 분회장 아버지의 부인이 대신해 합의금을 받을 수 있도록 B씨에게 “부인을 장례식장에서 데리고 나와 노조원들 모르게 택시를 타고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B씨는 노조원 몰래 염 분회장 아버지의 부인을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 부인이 합의금 일부인 3억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들 정보 경찰관은 염 분회장의 시신을 몰래 빼돌리는 과정에도 개입했다.
노조는 염 분회장의 아버지가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하자 “고인의 뜻에 따라 노조장으로 치르게 해 달라”고 반발했다.
이에 장례식장에서 촛불문화제를 준비하는 노조원들 몰래 염 분회장의 시신을 빼돌리기 위해 허위 내용의 112신고를 지시했다.
현장에 250여 명의 경력이 도착하자 노조와 대치하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혼란한 틈을 타 염 분회장의 시신을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 경찰관들은 염 분회장의 시신을 화장하려는 과정에 필요한 서류를 받기 위해 공문서를 허위로 작성하기도 했다.
염 분회장 화장은 애초 정해진 날짜보다 앞당겨 진행됐다.
삼성 측은 2015년 5월22일 B씨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고생했는데 식사 한번 하자”고 만남을 제안했다.
B씨는 “사측이 돈을 줄 것 같다”고 A씨에게 말했고, A씨는 “만나고 오라”고 했다.
같은 날 B씨는 양산시내 한 주유소 부근에서 사측 관계자로부터 1000만원을 받았다.
이 돈은 염 분회장의 장례가 가족장으로 치러지게 도움을 준 대가성이었다.
A씨와 B씨는 부정처사후수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허위공문서작성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B씨는 지난해 경찰직을 그만뒀지만, A씨는 여전히 현직에서 근무하고 있다.
A씨는 “자신이 돈을 받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이에 대해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강도 높게 규탄했다.
최봉기 경남지회장은 “열사 염호석 시신 탈취는 삼성이 설계하고 대한민국 경찰이 집행했다”며 “삼성이 어떻게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지, 그리고 사유화된 권력을 바탕으로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일갈했다.
최 지회장은 “삼성이 노조파괴라는 성과를 얻는 동안 국민은 국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 노조는 와해되고 이 과정에서 인륜은 철저히 유린됐다. 국정농단과 다를 게 없다. 반드시 엄정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원=강승우 기자 kkang@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