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다시 미뤄지며 150여 국내 의료기기 제조사들이 한 숨 돌릴 수 있게 됐다. 당장 영국의 브렉시트(Brexit)가 이뤄질 경우 2500억원에 달하는 수출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앞서 영국은 EU의 헌법 격인 리스본 조약 50조에 따라 EU의 탈퇴의사를 밝혔고 진나 3월 29일 23시(그리니치표준시·GMT)를 기해 브렉시트를 단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EU 간 브렉시트 합의안이 하원 승인투표(meaningful vote)에서 잇따라 부결되면서 영국은 지난달 EU에 브렉시트 연기를 요청했다.
이에 EU는 3월 말까지 영국 하원이 브렉시트 합의안을 승인할 경우 유럽의회 선거직전인 5월 22일까지 브렉시트를 연기하자고 했다. 그리고 만약 합의안이 부결될 경우 아무런 협정을 맺지 못한 채 오는 4월 12일까지 EU를 탈퇴하는 일명 ‘노딜 브렉시트(No deal Brexit)’를 선택하거나, 유럽 의회선거에 참여 후 브렉시트를 장기간 연기하는 안 중 선택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영국 하원이 브렉시트 합의안 중 법적 구속력이 있는 EU 탈퇴협정을 또 다시 부결하고, 대안을 찾기 위한 의회의 의향투표(indicative vote)까지 별다른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그 결과, 노딜 브렉시트는 막아야 한다며 메이 영국총리는 지난 5일 브렉시트를 6월 30일까지 추가연기해줄 것을 EU에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EU는 11일 정상회의를 열고 브렉시트를 10월 말까지 6개월가량 연기하되, 영국이 EU 탈퇴협정을 승인할 경우 바로 브렉시트를 허용하는 ‘탄력적 연기(flexible extension)’ 안을 내놨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미래관계 정치선언’의 수정도 가능하다는 입장도 밝혔다.
단, 브렉시트 합의안 중 브렉시트 전환(이행)기간, 분담금 정산, 상대국 국민의 거주권리, 영국과 EU가 미래관계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영국 전체를 당분간 EU 관세동맹에 잔류하도록 하는 ‘안전장치(backstop)’ 등의 내용을 담은 EU 탈퇴협정의 재협상은 불가능하다는 등의 단서도 달았다.
문제는 ‘안전장치’를 둘러싼 영국 내부갈등의 향배와 영국의 결정에 따라 수출길이 막힐 수도 있는 국내 150여 의료기기 제조사들의 상황이다. 핵심은 유럽CE인증(Conformite Europeen Marking)이다. EU 이사회는 EU 시장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안전과 건강, 환경, 소비자보호 등에 대한 통합규격인증마크인 CE인증을 의무적으로 받아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만약 영국 내부의 의견이 조기에 합의돼 브렉시트가 빨라질수록 영국의 인증기관에서 CE인증을 받은 국내 제조사들은 영국의 EU탈퇴로 인해 인증을 다시받기 전까진 유럽으로의 수출길이 막혀버리는 셈이다.
국내 의료기기 제조사들의 모임인 한국의료기기협동조합 이재화 이사장은 “노딜 브렉시트가 이뤄질 경우 그 즉시 영국의 인증기관에서 받은 CE인증으로는 유럽에 제품을 팔 수 없게 된다”면서 “CE인증을 품목별로 유럽에서 다시 받아야하는데 그동안 2500억원 규모의 수출이 당장 0원이 되고, 폼목별로 1500만원 이상의 인증비용이 추가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탄했다.
이어 “현재로서는 브렉시트 이전에 영국에 적을 두고 있는 인증기관이 유럽으로 본사를 옮기거나 EU가 해당 기관의 CE인증을 그대로 인정해주거나 재인증까지만이라도 유예해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며 “정부도 크게 힘을 쓸 수는 없겠지만 국가 차원에서 노딜이 돼도 인증 유예가 되도록 EU에 적극적으로 건의해주길 바란다”고 간절함을 담아 뜻을 전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