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선고자에게 희망고문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하는 것 아닌가요?” 최근 췌장암 환자들 사이에서 서울아산병원과 식품의약품안전처를 향한 원망이 커지고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에게 생명줄이라고 믿을만한 약과 치료방법이 있고, 실제 3개월이라던 삶을 3년 이상 이어오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정부의 의약품 임상 및 허가정책과 의사의 개인주의적 사고에 희망을 잃고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엄 모(55)씨는 3개월 전 연세의료원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췌장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증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주변으로의 전이가 진행된 후였다. 더구나 췌장(이자)의 위치가 앞으로는 위, 뒤로는 대동맥과 대정맥이 있어 수술과 같은 외과적 시술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병원에서도 달리 방법이 없다며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해 종양의 크기를 일부나마 줄이며 추이를 살피자고 권했다. 하지만, 엄 씨는 면역체계가 파괴되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기보다는 하루라도 인간다운 삶을 살겠다며 거부했다.
현재 그는 병원에서 통증제어 등을 위해 지어준 약과 항암버섯 등 암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각종 민간요법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 가운데 잠시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생을 정리하는 와중에 광역학치료(PDT)가 부작용은 없고 효과는 좋다는 말을 들은 후다.
하지만 엄 씨는 희망은 곧 사라졌다. 유일하게 말기 췌·담도암 환자를 대상으로 서울아산병원 박도현 교수가 진행한 연구자임상이 2018년 종료돼 더 이상 치료를 받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눈앞에 치료방법이 있는데 손 쓸 도리가 없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한숨만 내쉬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엄 씨의 희망이 헛된 기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실제 박 교수가 췌장암환자 2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자임상에 직접 참여한 한 관계자에 따르면 임상시험결과는 ‘혁신적’이었다. 대부분의 환자에서 종양의 크기가 줄었고, 평균 생존기간이 2배 이상 늘었으며 부작용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2007년 대한내과학회지에 실린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통상 기존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췌장암 말기(4기) 환자의 생존기간 중간값은 5.5개월이다. 반면 박 교수가 유럽 소화기내과학회가 주관하는 ‘2018 UEG(United European Gastroenterology)’ 학술대회에 제출했던 발표자료에 따르면 생존기간이 304일로 약 10개월로 2배 가까이 길었다.
게다가 임상시험 관계자를 통해 입수한 임상결과에서도 29명 중 9명의 췌장암 환자가 2015년 12월을 시작으로 2세대 광과민제 ‘포토론’을 이용한 내시경 방식의 광역학치료(PDT)를 2번 이상 받았고, 유의미한 효과를 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췌장암환자의 상세악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체중변화가 이들 9명 중 3명을 제외하고 5kg 미만이었고, 체중이 증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확인된 몇몇은 2018년 1월 임상 종료 후 추가시술을 받지 못하고도 완치판정을 받아 지금까지 생존해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PDT가 췌장암 치료의 또 다른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나아가 이들 임상시험 참여자들이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 등 기존 치료에 반응이 없어 사실상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환자였음을 감안할 때 “놀랄만한 결과”라고 극찬했다.
심지어 한 의사는 “이 같은 연구결과가 발표된다면 답보상태의 췌장암 치료분야에서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을 만한 결과일 것”이라며 “왜 임상이 끝난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 발표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움과 의문을 표하기까지 했다.
임상시험에 관여했던 관계자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추적관찰을 하는 환자도 있다. 임상시험만이라도 다시 시작된다면 췌장암 환자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약도, 치료법도, 의사도 있지만, 정부의 무관심과 원칙주의, 의사의 이기심에 환자들은 생명을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상시험의 시작과 끝을 모두 관리하는 식약처가 정작 연구자 임상에서는 형식적이고 서류중심으로 검토를 일관하고 있어 정작 환자를 위한다는 임상시험의 본 취지와 목적을 방기하고 있다는 질타다. 더불어 연구윤리와 결과, 과정을 연구자 개인에게만 전적으로 맡겨 환자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절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따끔한 교훈을 되새기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한 제약계 관계자는 “지금의 임상시험 허가·심사·관리체계는 지나치게 행정 편의적이고 형식적이며 기업에 대한 규제중심”이라며 “정부부처가 환자와 국민의 건강이라는 핵심을 잊지 않고, 보다 큰 틀에서 폭넓게 협의하고 대처해야한다. 당장 R&D 지원에 수조원의 돈을 쏟기 전에 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와 태도부터 정비해야한다”고 꼬집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