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대교구의 대주교좌 성당인 이 교회는 공식적으로는 뮌헨 대성당(Münchner Dom)이라고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성모교회(Frauenkirche)라고 부른다. 합스부르크의 지기스문트(Sigismund) 공작과 뮌헨의 사람들에 의해 15세기에 후기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교회는 12세기에 건설된 도시의 첫 번째 성벽에 인접해있던 로마네스크양식의 건물을 대체해 지은 것으로 옛 페터 교회(Peterskirche)에 이어 대주교좌 교회가 됐다.
외르그 폰 할스바하(Jörg von Halsbach)의 설계에 따라 1468년 건설을 시작했는데, 인근에서 석재를 구할 수 없었던데다 재정적 이유가 겹쳐 벽돌로 지었다. 1479년 건설자금이 바닥이 나면서 교황 식스투스 4세에게 청원하여 면죄부를 판매해 건축비를 충당했다. 1488년 98m 높이의 두 개의 탑이 완성됐고, 교회는 1494년에 봉헌됐다.
설계에 따르면 탑은 더 높고 개방적인 첨탑을 올리기로 했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1525년까지 미완성인 채로 지냈다. 교회는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는데, 당시 뮌헨의 인구가 1만3000명이었고, 옛 페터 교회도 있는 상황에서 보면 지나친 규모라는 평가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뮌헨을 방문했을 때 성모교회를 찾아 면죄부를 판매한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는 내용을 적은 동판이 있다.
후기 고딕 양식의 벽돌 건물은 길이가 109m, 너비가 40m, 높이가 37m이다. 특징적인 돔을 가진 2개의 타워 가운데 북쪽 타워의 높이는 98.57m이고 남쪽 타워는 98.45m이다. 벽돌로 지은 교회건물 가운데 알프스 북쪽에 있는 것으로는 그단스크에 있는 성모교회 다음으로 크다.
내부 공간은 두 줄로 늘어선 높이 31m의 기둥 22개에 의하여 중앙통로와 양쪽 측면통로로 구분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연합군의 공습으로 지붕이 무너져 교회 내부에 있던 역사적 유물 상당수가 유실됐다. 전쟁 후 바로 복원을 시작해 1994년에 완료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단에 걸린 성모 승천(Assumption of Mary)는 페터 칸디드(Peter Candid)가 1620년에 그린 것이다. 그밖에도 에라스무스 그라서(Erasmus Grasser), 얀 폴라크(Jan Polack), 한스 라인베르거(Hans Leinberger), 한스 크룸퍼(Hans Krumpper), 이그나츠 귄터(Ignaz Günther) 등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활동한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대성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성모교회의 교회 현관에 새겨진 검은 발자국에 흥미로운 사연이 숨어있다. 토이펠스트리트(Teufelstritt, 악마의 다툼)이라고도 하는 이 발자국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먼저 할스바흐가 건축한 창 없는 교회에 호기심이 생긴 악마가 찾아와 조롱하느라 서 있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전설에는 교회건축자금이 부족한 건축업자와 악마가 계약을 맺었는데, 창문이 없는 교회를 짓는 조건이었다는 것이다. 건축가는 현관에 선 악마가 창문을 볼 수 없도록 기둥을 세워 속였다는 것이고, 악마는 완성된 교회에 들어가 확인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른 흔적이 발자국으로 남았다고 전한다.
교회로 들어가는 문은 서쪽의 두 종탑 사이에 있는 주 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각각 2개씩의 통로가 있다. 마리엔 광장 쪽에서 가까운 남동쪽 통로를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데, 도나투스포털이라고 하거나 혹은 브라우스포털(Brautportal, 신부의 문)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쉬란넨토르(Schrannentor, 시장의 문)이라고 불렀다. 148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굵은 빗방울을 피해 몰려든 사람들까지 더해져 혼잡한 성모교회에서 봉헌되는 미사에 참여한 셈이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엄숙한 분위기에 절로 몰입돼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까지 식당에 가야했기 때문에 미사 중간에 교회를 나섰다. 가는 길에 바이에른 국립극장(Bayerische Staatsoper)을 지나가게 됐는데 성장한 남녀들이 모여드는 것으로 보아 공연이 있었나보다.
막스-요세프 광장(Max-Joseph Platz)에 있는 바이에른 국립극장에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단(Bavarian State Opera)과 국립 발레단(Bayerisches Staatsballett)이 속해있다. 막스-요세프 광장은 바바리아 최초의 공작이며 바바리아왕국의 첫 번째 왕이던 막시밀리언 1세 요세프(Maximilian I. Joseph)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국립극장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된 광장이다. 광장에는 막시밀리언 1세 요세프의 좌상이 있다.
국립극장은 막시밀리언 1세의 요청에 따라 건축됐다. 카를 폰 피셔(Karl von Fischer)가 파리의 오덴극장(Ordéon Theatre)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를 했다. 1802년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이 철거된 장소에 1811년 착공하여 1818년에 개관했다. 이렇게 개관한 극장은 1823년에 화재로 소실됐지만 그리스 건축에서 영감을 얻은 레오 폰 클렌제(Leo von Klenze)의 설계에 따라 빠르게 재건돼 1825년에 다시 개관했다.
1930년에는 무대를 넓히고 새로운 장비를 도입할 수 있도록 개조됐지만,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폭격으로 다시 파괴됐다. 전후 게르하르트 모리츠 그라우버(Gerhard Moritz Grauber)가 설계한 1200석 규모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을 다시 지어 1963년 11월 22일 문을 열었다. 개관공연작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들(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이었다.
7시 무렵 뮌헨 중앙역 맞은편에 있는 호프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호프집에 들어가면서 보니 우리 버스기사는 차를 대면서 누군가와 한바탕 설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정말 피가 끓는 모양이다. 독일 사람들이 호전적인 인성을 가진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봤다. 이날 저녁은 특식으로 비엔나, 뢰벤브로이. 화이트 증 소시지 3종 세트에 맥주를 곁들였다. 맥주를 마신 탓인지 아니면 새벽산책부터 시작해서 가는 곳마다 걸은 거리의 합이 14km에 달했기 때문인지 초저녁부터 졸음이 쏟아졌다.
독일 구경에 나선지 넷째 날이다. 8시에 뮌헨의 숙소를 출발 동남쪽으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킴제(Chiemsee), 그러니까 킴 호수로 향한다. 버스의 창밖으로 펼쳐지는 널따란 밭에는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대부분 사료로 쓴다고 했다. 바바리아의 로젠하임(Rosenheim) 근처에 있는 킴제는 민물호수임에도 간혹 바바리아해라고 부른다.
킴제는 1만년전 마지막 빙하기에 흘러내린 빙하에 깎여 생겼다. 원래 호수는 240㎢의 넓이였던 것이 이제는 80㎢로 줄어들었다. 킴제는 남쪽에서는 그로사헤(Großache) 강이, 서쪽에서는 프리엔(Prien) 강이 흘러들고 있고, 북쪽에서는 알츠(Alz) 강이 흘러나간다. 알츠 강은 동북쪽으로 흘러 마르크틀(Marktl) 인근에서 인(Inn)강과 합류하는데, 인 강은 다뉴브 강으로 흘러든다.
킴제의 서쪽, 프리엔 강 가까이 있는 프리엔 암 킴제(Prien am Chiemsee)에서 멀지 않는 호수 안에 3개의 섬이 있다. 호안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 238헥타르(ha) 넓이의 헤렌인셀(Herreninsel, 신사섬)이다. 가장 먼 섬이 다음으로 큰 15.5헥타르 넓이의 프라우엔인셀(Fraueninsel, 숙녀섬)이다. 그 사이에 제일 작은 3.5헥타르 넓이의 크라우틴셀(Krautinsel)이 있다.
‘양배추 섬’이라는 의미의 이름은 중세 무렵 이 섬에서 배추를 비롯한 채소를 재배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프라우엔인셀에는 782년에 지은 베네딕트 수도원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 이 있다. 수도원의 수녀들은 크로스터리쾨르(Klosterlikör, 수도원 향주)와 아몬드 과자인 마르지판(marzipan)을 만든다.
9시 20분 프리엔 암 킴제에서 헤렌인셀로 가는 배를 탔다. 배가 부두를 떠나 섬으로 향하는데 보니 멀찌감치 서 있는 산들이 호수를 호위하듯 둘러선 듯하다. 호수 위에는 요트, 모터보트 그리고 노를 젓는 작은 배들이 떠있다. 주말을 맞아 여가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한가롭다. 손에 잡힐 듯한 섬까지 배로 가는데 불과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섬에 도착해서 숲 사이로 펼쳐지는 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20여분을 걸어가면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순간을 맞는다. 루드비히 2세가 파리의 베르샤유 궁전을 모방해 지은 헤렌킴제 성이다. 아랫단에는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정원이 펼쳐지고 윗단에는 양쪽으로 커다란 분수 2기가 설치되고 그 뒤로 궁전이 서있다.
1878년 루트비히 2세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 따서 지은 헤렌킴제(Herrenchiemsee)라는 궁전이다. 루트비히2세는 아우구스틴 수도원의 부지였던 헤렌인셀을 구입하여 수도원건물들을 옛 궁전(Altes Schloss)이라고 하는 거주지로 개조하는 한편, 1878년부터는 베르사유 궁전을 본뜬 헤렌킴제(Herrenchiemsee)라는 이름의 새 궁전(Neues Schloss)을 건설하게 됐다. 루트비히2세가 추진했던 건설사업 가운데 가장 마지막이면서 가장 큰 건물이었는데, 완공을 보지 못한 채 남아 있다.
헤렌인셀의 북쪽 끝단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은 765년 바바리아 공작 타실로3세(Tassilo III)가 지은 것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620~629년간에 브르고뉴 출신의 유스타스 뤽소이(Eustace Luxeuil) 성인이 기초한 것으로 바바리아 공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었다.
969년 신성로마제국의 오토황제는 수도원을 잘츠부르크 대주교에게 위임했다. 지금 남아있는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은 1642~1731년 사이에 세워진 것이다. 독일의 영토를 중재하던 시기(1802년~1814년)인 1803년 수도원이 세속화됐으며, 1807년에는 대성당이 파괴돼 해체됐다. 결국 루트비히 2세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루트비히 2세는 궁전건축가인 게오르그 폰 돌만(Georg von Dollmann)에게 맡겨 베르사유 궁전과 흡사한 설계를 완성했다. 궁전의 건설은 1870년 일어난 보블전쟁 때문에 연기돼 1878년에서야 착공할 수 있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루트비히 2세는 공사의 진행을 직접 챙기곤 했다. 루이 14세에 경도됐던 루트비히 2세는 루이 14세가 주장하는 신성한 왕권에 대한 존경심을 헤렌킴제 궁전에 담으려 애썼지만 왕가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1885년에 아직은 미완성인 상태의 헤렌킴제 궁전에 며칠 머물면서 다채로운 장식으로 풍성하게 꾸며진 객실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루트비히2세가 임종한 다음 공사가 중단되었고, 불과 며칠 뒤에는 미완성인 상태의 궁전을 일반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1923년 바바리아왕국의 루프레히트(Rupprecht) 왕세자는 헤렌킴제를 바이에른 주에 양도했다.
슈방가우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중세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헤렌킴제 궁전은 루이 14세에 대한 루트비히 2세의 존경심을 담은 기념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홀의 천정에는 루이 14세를 상징하는 25개의 천정화가 그려졌다. 한편 헤렌킴제 궁전에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느낌이 많이 스며들어있다. 베르사유 궁전처럼 거울의 홀에는 17개의 아치가 있으며, 평화의 홀과 전쟁의 홀에는 각각 3개의 창이 있다. 식당에는 상하이동이 가능한 식탁과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이센(Meissen) 도자기 샹들리에가 있다.
정원 역시 베르사유 궁전과 흡사하게 구성됐는데, 분수와 베르사유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인 양식의 동상과 루트비히 2세가 좋아하던 환상적인 낭만주의 양식의 동상들이 서있다. 정원 위쪽의 왼쪽에 있는 분수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파마여신을 세웠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파마(Fama)는 소문(fame)이나 명성을 인격화한 여신으로, ‘대화를 시작해 발전시키는 여신’으로 묘사되는데, 좋은 소문을 좋아하고 나쁜 소문에 분개한다. 오른쪽에 있는 분수에는 역시 로마신화에 나오는 포르투나(Fortuna) 여신을 세웠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맡아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운명의 여신’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