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혁신 신약과 의료기기 개발을 지원하겠다며 2025년까지 연간 4조원의 연구개발(R&D)비를 투자하기로 했다. 이에 제약·바이오·의료기기업계를 대표하는 단체들은 일제히 환영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부정적 견해를 밝히는 이들은 “각종 규제와 장벽에 막힌 현실로 인해 큰 기대가 없어 나오는 반응”이라거나 “지원확대가 특정 기관이나 기업에 집중돼 대다수는 사각지대에서 여전히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와 전망을 내놨다. 현행 제도나 지원사업이라도 잘 정비하고 알려, 많은 연구자나 기업이 있는 것부터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특히 임상시험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 제약계 관계자는 “4조원이라는 큰돈을 정부가 투자하는 목적은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 아니냐”면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혈세를 쏟아 붇기 전에 다수의 기업들이 도전할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수도권 소재 한 대학병원 교수는 “연구자임상의 활성화를 위한 규제개혁과 정부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의뢰자주도 임상시험(SIT, sponsor initiated trial)과 달리 연구자주도 임상시험(IIT, investigator initiated trial)은 보다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활발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더해 연구자 임상시험 결과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사장되는 연구들이 많다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아산병원 박도현 교수의 2세대 광과민제 ‘포토론’과 특수내시경을 이용한 췌·담도암 광역학치료(PDT)다. 2017~2018년 초 진행된 박 교수의 연구자임상시험은 췌·담도암 환자의 생존기간을 늘리고 부작용이 거의 없어 환자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연구결과는 2019년 7월 현재까지 발표되지 않고 있다.
당연하지만 상품화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적응증 확대나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신청은 제약사나 해당 제품을 소유한 기업의 몫인데다 IIT에 대한 결과발표는 전적으로 연구자에게 일임돼 있어 혁신적 성과조차 관리가 되지 못해 사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PDT 기술 또한 복강경 등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 방안이 제약사 주도로 연구되곤 있지만 임상에 적용될 때까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절망하게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의약품 등의 허가 외 사용(오프라벨)과 새로운 치료기술의 허가 확대나 임상 적용을 위한 연구자들의 도전이 ‘데스밸리(Death Valley, 죽음의 계곡)’를 건너지 못해 환자에게 쓰이지 못하는 문제가 종종 나타나고 있다. 두 사안 모두 제약사가 아닌 연구자가 중심에 있어 행정적 절차나 비용에 대한 부담, 심지어 자격요건의 제한 등에 막혀 있어서다.
이와 관련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김범석 교수는 “안타깝게도 IIT를 수행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수억~수십억씩 드는 연구비용을 연구자 개인이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규제만 까다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IIT가 사라지고 SIT만 남는다면 희귀암 환자분들의 새로운 치료법 개발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된다. 또 제약회사 이익만이 대변돼 의료비상승이 초래될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국내 제약기업 관계자는 “신약이든 의료기기든 기업은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만큼 새로운 시장에 대한 내부전략에 따라 적응증 확대나 임상시험 계획 등을 수립한다. 이윤이 안 된다면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다”면서 “국가 차원에서 임상시험의 결과를 종합·정리해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추진하고 있는 환자 맞춤형 임상시험 통합관리시스템에 추가한다면 국민이나 국가, 기업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환자 맞춤형 임상시험 관리체계를 고민하고 있는 서울대병원 허대석 암센터 소장(내과)은 “임상시험결과가 DB화되면 산업화 등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연구 지원이나 통합관리는 환자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는지를 가장 우선으로 두고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지 않는 차원에서 국가가 지원을 해야 할 것”이라며 “산업체와 이해관계가 많이 얽힌 부분이라 쉽지는 않다. 우선은 규제제도부터 많이 풀어야한다”고 변화의 어려움을 대변하기도 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