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네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네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7-13 13:33:56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를 돌아서 뒤편으로 나가면 시청건물이다. 14세기 초까지 뉘른베르크에는 시청건물이 없었다. 1322년 들어서야 소금 시장에 있는 시토수도회의 빵집을 구입해 법정과 마을회관을 건설했다. 지금의 옛 시청건물 지하에 있는 중세의 동굴감옥은 당시에 만든 것으로 지금은 복원해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1332~1340년 사이 건축가 필리프 그로스(Philipp Groß)의 감독으로 시청의 대회의실이 들어있는 남쪽 홀 건물을 지었다. 이어서 북쪽으로 2개의 별관건물이 추가됐고, 동쪽에는 회의실이 있는 건물을 지었다. 

16세기 초, 시의회는 시청을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1514~1515년에 한스 베하임(Hans Beheim)에 의해 후기 고딕양식의 커튼형 전면을 가진 시청회의실 건물을 북쪽에 지었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참여한 전면의 장식은 1521년에, 대회의실의 회화는 1528~1530년에 완성됐다. 대회의실의 회화는 10년 뒤에 시작한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정화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17세기 들어 100년이 넘게 제국의 도시로 발전을 거듭해온 것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궁전양식에 따라 새로운 시청건물을 짓기로 했다. 하지만 야콥 울프(Jakob Wolff)의 설계는 이탈리아 양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결국 시청건물단지의 서쪽 건물은 획일적인 창문을 가진 고딕양식을 취했는데, 3개의 바로크 양식의 입구와는 대조를 이뤘다. 

바로크양식의 현관을 장식한 조각은 1617년 조각가 레온하르트 컨(Leonhard Kern)이 구약의 다니엘서 7장에서 예언하고 있는 동물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정문의 왼쪽 현관에는 독수리의 날개를 단 사자와 곰을 조각했고, 정문 오른쪽 현관에는 4개의 새날개와 4개의 머리를 가진 표범과 10개의 뿔을 가진 불가사의한 동물을 조각했다.

1616년 초석을 놓기는 했지만 30년 전쟁의 발발로 건설이 지지부진하다가 1622년에는 중단됐다. 건축은 종전 이후에 재개돼 완성됐다. 북동쪽 구석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건물은 1885~1889년 사이에 아우구스트 에센바인(August Essenwein)의 설계에 따라 신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뉘른베르크를 강습한 폭격에서 옛 시청건물도 살아남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1956~1962년 사이에 옛 시청건물이 재건됐고, 1982~1985년까지 내부까지 복원이 완료됐다. 한편 옛 시청과 중앙시장광장의 북쪽 사이에 새로운 시청건물을 짓게 됐다. 1951년 건축가 커트 쉬네켄도르프(Kurt Schneckendorf)의 설계로 1954~1956년에 지어진 것이다. 사암을 써서 격자 모양으로 지은 건물이 역사적인 도시풍경에 어울리도록 하였다. 

옛 시청의 서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그 끝에 신청사가 서 있고, 신청사 앞, 중앙시장(Nürnberger Hauptmarkt)의 모퉁이에 황금색 분수대가 서 있다. 쇠너 분수(Schöner Brunnen)다.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분수’이다. 약 19m 높이의 분수에 고딕 양식의 첨탑을 올린 쇠너 분수는 하인리히 베하임(Heinrich Beheim)이 1385~1396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쇠너 분수는 원래 중앙시장 건너편에 있는 성모 교회(Frauenkirche)의 탑 위에 설치하려고 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조각을 탑 위로 들어 올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지금의 자리에 둔 것이라고 한다. 성모 교회는 1358년에 봉헌됐다.

분수대를 장식하고 있는 첨탑과 40명의 조각상은 신성로마제국의 세계관을 나타낸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첨탑은 세상의 모든 것이 천국으로 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아래로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세웠다. 동쪽으로부터 모세와 구약에 나오는 호세아, 다니엘,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이사야, 요엘 등 일곱 명의 선지자가 차례로 서있다.

그 아래로 인류의 일치를 제안하는 아홉 영웅과 7명의 선제후 등, 16명의 통치자를 세웠다. 독일어로 노인 구테 헬덴(Neun Gute Helden)이라고 하는 아홉 영웅은 이교도, 유대교, 그리스도교를 각각 대표하는 3인의 영웅들이다. 이교도였던 고대의 통치자로는 트로이왕국의 헥터(Hector), 그리스 마케도니아왕국의 알렉산더(Alexander) 대왕, 그리고 로마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있다. 유대교를 대표한 여호수아(Joshua), 다비드(David), 유다 마케베우스(Judas Maccabeus) 등이다. 

그리스도교를 대표한 아더(Arthur)왕, 샤를마뉴(Charlemagne)대제, 부용의 고드프리(Godfrey of Bouillon)가, 7명의 선제후로는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 등 3명의 성직제후와, 보헤미아 국왕, 브란덴브르크 변경백, 라인 궁중백과 작센공 등 4명의 세속제후이다. 이들의 발치에는 에펠라인(Eppelein)과 쉬텐사멘(Schüttensamen)을 포함하는 뉘른베르크의 주요 적들이 찡그린 모습을 하고 있다.

수조의 가장자리에는 중세로 전해오는 고대의 학문에 기여한 위대한 학자들을 여덟 방향에 각각 앞뒤로 배열해 세웠다. 먼저 앞에는 중세 학교에서 중요한 교과목이었던 철학과 3개의 언어학 그리고 4개의 자연과학 분야를 대표하는 위인들이다. 

철학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는 책을, 음악을 대표하는 피타고라스는 목자의 피리인 시링스(Syrinx)를, 기하학을 대표하는 유클리드는 직각자와 집게를, 천문학을 대표하는 프톨레마이오스는 육분의를, 수리학을 대표하는 니코마쿠스는 계산표를, 토론,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방을, 수사학의 대표 키케로는 조여 맨 가방을, 문법을 대표하는 도나투스는 소년을 가르치는 책을 각각 들고 있다. 

이들의 뒤에는 이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을 세웠는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네 명의 복음사가와 중세교회를 대표하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그리도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등 네 명의 교부를 세웠다. 이들이 앞에 앉은 여덟 명의 작은 인물들을 조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쇠너 분수는 도시의 말썽꾸러기 아이들 때문에 몸살을 앓게 되었다. 따라서 4반세기가 지날 무렵이면 채색을 반복해야 했다. 결국 1586~1587년에 파울루스 쿤(Paulus Kuhn)으로 하여금 분수 주변에 단철로 격자를 설치해 보호하도록 했다. 흥미로운 것은 보호격자 맨 위에는 단철 그리드에 끼워진 황동 반지에 얽힌 전설이다. 

그리드를 만든 쿤에게는 마르그리트(Margret)라는 딸이 있었다. 쿤은 분수의 격자를 장식할 신묘한 반지를 만드는 사람과 딸을 결혼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가난한 도제가 나서자 쿤은 “분수의 격자에 반지를 어떻게 끼워 넣을 건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래서 그걸 만들지 않을거야!”라면서  제자를 내쫓았다. 스승이 여행을 떠난 뒤 제자는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황동반지를 만든 다음 격자에 끼워 넣어 납땜을 하고 두드려서 솔기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스승은 제자가 만든 황동반지를 보고 후회했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젊은 여성이 황동반지를 3번 돌리면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반지를 돌리는 만큼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도 한다. 황동반지는 남서쪽 격자에 걸려있는데 북서쪽에 있는 검은 철제반지처럼 관광객을 위한 것이다. 계단에 올라서도 철책 위의 황동반지를 만지려면 안간힘을 써야 한다. 키가 작은 사람들은 철책 사이에 발을 끼워 넣고 올라서야 겨우 닿을 수 있다. 황동반지는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손에 닿은 탓에 반질반질하다. 반지를 만진 여성들이 모두 원하는 만큼의 아이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중앙시장에서는 마침 바이오 축제가 열렸던 모양이다. 해가 설핏 기울고 있는 시간이라서인지 이미 전시한 물건들을 치운 천막도 있어 한산한 느낌이다. 북쪽은 약 56m, 동쪽과 남쪽은 약 75m, 서쪽은 약 85m인 사다리꼴의 중앙시장이 있는 장소는 원래 페그니츠강 유역의 습지였다. 12세기 무렵 라인지방에서 추방돼 이주해온 유대인들에게 정착지로 제공됐다. 11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뉘른베르크의 요새화작업의 일환으로 페그니츠 강을 따라 성벽을 쌓던 작업이 마무리됨에 따라 유대인 지구(ghetto)가 도시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됐다. 

1349년 카를4세의 승인을 받아 600여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그들이 살던 곳을 파괴했다. 그 무렵 뉘렌베르크에도 흑사병이 유행했는데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이미 형성돼있던 긴장감이 예방이나 치료방법이 없던 흑사병에 대한 공포로 옮겨가게 됐다. 결국 유대인들이 흑사병을 옮긴다고 지목해 박해한 것으로, 흑사병 포그롬(Pestpogrom, 흑사병으로 인한 소수민족 학살)이라고 부른다. 

그 뒤로 유대인 지구에는 2개의 커다란 시장광장이 들어섰다. 북동쪽에는 과일시장이 들어섰고, 다른 쪽에는 그뤼너 마르크트(Grüner Markt) 혹은 그로서 마르크트(Großer Markt)로 부르던 시장이 위치했다. 1809~1810년 무렵부터는 이 시장을 중앙시장이라고 부른다.

중앙시장을 건너 쇤너 분수 맞은편에 있는 성모 교회(Frauenkirche)로 갔다. 벽돌로 지은 고딕양식의 성모 교회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의 발원에 따라 1352~1362년 사이에 지어졌다. 원래는 유대인 지구에 있던 유대교 회당이 있던 자리다. 유대교 회당은 히브리어로 베트 크네세트(בית כנסת, 모임의 집)라고 하는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권 국가에서는 ‘모임’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시나고게(συναγωγή, synagogē)'에서 유래한 시나고그(synagogue)라고 부른다.

건축가 페터 팔러(Peter Parler)가 지었을 것이라고 하는 성모교회는 두 개의 통로와 황제를 위한 제단이 있는 통합된 공간으로 된 교회이다. 황제의 다락 혹은 미카엘 성인의 다락이라고 하는 트리포리움이 아케이드를 통하여 본당으로 연결되는데, 아치들은 세 개의 장미로 장식된 문구(tracery)로 채워졌다. 교회의 정면에는 만라인라우펜(Männleinlaufen)이라고 하는 기계식 시계가 걸려있다. 135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4세의 주도로 제국의 기본법인 금인칙서(Goldene Bulle)를 제정한 것을 기념해 1509년에 설치한 것이다. 

금인칙서는 1356년 1월 10일에 뉘른베르크 호프타그(Nürnberger Hoftag)에서 선포돼 뉘른베르크 법전이라고도 부른다. 만라인라우펜은 일종의 천문시계로 정오가 되면 두 명의 악사가 팡파르를 울리고 이어서 2명의 악사가 플루트를 연주하고 북을 친다. 그리고는 황제의 오른쪽 문이 열리면서 7명의 선제후가 나와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는 들어간다. 중세의 예술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의외로 조촐해 보인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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