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7-24 15:38:18

옛 시청을 구경하고서 가까운 언덕 위에 있는 밤베르크 대성당(Bamberger Dom St. Peter and St. Georg)으로 갔다. 밤베르크 대성당은 1002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2세에 의해 짓기 시작해 2012년에 봉헌됐다. 대성당언덕에 있는 2개의 토굴 위에 세워진 대성당은 지금의 대성당보다 작은, 길이 75m 규모였다. 서쪽에 합창단석이 있고, 동쪽으로 2번째 성당이 있는 십자가 형식의 공회당이다. 이 성당은 1081년 부활절 주일에 소실됐었는데, 내부 장식은 완전히 불에 탔지만 다행히 구조는 피해가 경미해 바로 재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재건된 대성당 역시 1185년 완전히 불타버렸다.

지금 볼 수 있는, 길이 약 94m, 넓이 28m, 높이 26m에 약 81m 높이의 4개의 탑이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은 안데흐스-메라니아(Andechs-Merania) 가문의 오토(Otto)주교와 에크베르트(Ekbert) 주교 등에 의해 재건돼 1237년에 다시 봉헌된 것이다. 1611년부터 대성당의 내부를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시작돼 30년 전쟁 이후까지 이어졌다. 1802년에 밤베르크의 주교좌 교구가 세속화했다. 1837년에는 루트비히 1세의 주도로 대성당 내부를 바로크 양식에서 다시 중세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회귀하게 됐다.

대성당을 다시 짓는 과정에서 건축양식의 변화가 있었는데, 성당의 서쪽 부분은 내부 구조에서부터 바깥에 있는 2개의 탑까지도 고딕양식으로 지었고, 첫 번째 교황이자 로마 가톨릭의 상징하는 베드로 성인에게 헌정됐다. 반면 성당의 동쪽 부분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고, 게오르그 성인에게 헌정된 것이다. 

게오르그 성인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박해를 받아 순교해 비잔틴교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베드로 성인에 이어 밤베르크대성당의 2번째 수호성인이다. 밤베르크 대성당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를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이 로마제국을 이었다는 점을 상징하기도 한다.

대성당의 주요 입구는 대성당 광장 방향의 북쪽에 있다. 왕자의 문(Fürstenportal)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날에만 열린다. 입구에는 예언자와 사도들의 상을 새겼다. 동쪽 탑에는 아담의 문(Adamspforte)과 마리엔의 문(Marienpforte)이 있다. 아담의 문 오른쪽에는 아담과 이브의 조각이 있고, 왼쪽으로는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 황후 그리고 스테판 성인의 조각을 세웠다.

내부에 들어가면 양쪽 끝에 성가대석이 있는 제단이 있고, 양끝을 연결하는 주랑이 있다. 제단 아래로는 토굴이 있다. 동쪽 성가대석 아래로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 황후의 유해를 담은 관이 놓여있다. 1.7m 높이의 석관은 1499~1513년 사이에 조각가 틸만 리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가 프랑스의 쥐라지역에서 나는 대리석과 석회암 등으로 제작한 것이다. 

상판은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후기 고딕양식으로 새겼고, 측면에는 쿠니군테 황후가 시죄법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장면, 베네딕트 성인의 가료를 받는 황제의 모습과, 황제의 죽음, 미카엘리스 천사장이 황제의 영혼을 무게를 다는 장면 등을 볼프강 카츠하이머 (Wolfgang Katzheimer)의 스케치를 토대로 새겼다.

무덤 근처 성가대석 옆의 기둥에는 밤베르크 라이터(Bamberger Reiter)라고 알려진 기마상이 있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호헨쉬타우펜 가문의 출신의 독일 황제일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근래에는 11세기 무렵의 헝가리 왕국의 국왕 스테판 1세라고 보고 있다. 서쪽 제단 위에는 주교의 의자(Kathedra)가 있고, 그 뒤로 교황 클레멘스 2세의 석관이 놓여있다. 다시 그 뒤로는 십자가를 모신 제단이 있다.

밤베르크 대성당을 지나면 대성당광장의 맞은편에 노이에 레지덴츠(Neue Residenz, 새 궁전)가 있다. 대성당과 새 거주지 사이에 있는 옛 궁전(Alte Hofhaltung)을 대신해 1602년부터 밤베르크 주교후들이 살던 궁전이다. 오늘날에는 주립도서관과 밤베르크 주립 미술관이 들어있다. 당시 밤베르크는 주교가 후작의 신분을 겸해 세속을 다스렸다. 그리해 주교후(Fürstbischöfe)라고 불렀다. 

주교후는 10세기 중반 신성로마제국의 오토1세가 자신의 친척들을 내세워 제국 내 영주들의 세력을 제압하려다 실패한 뒤에 도입한 제국교회정책의 일환으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주교들에게 관할 교구를 다스릴 수 있는 행정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1521년에는 주교령이 53개에 달했던 것이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1648년에는 23개로 줄었다가 세속 제후들의 도전에 직면했고, 1803년에 교회를 세속화시키면서 사라졌다.

새 궁전은 4개의 건물이 2단계에 걸쳐 건설됐다. 처음에는 1602년 게브사텔(Gebsattel)의 요한 필리프(Johann Philipp) 주교후가 르네상스 양식의 배후에 2개의 날개를 가진 건물을 지었다. 1697년부터 1703년 사이에는 쇤보른(Schönborn)의 로타르 프란츠(Lothar Franz) 주교후가 레온하르트 디엔첸호프(Leonhard Dientzenhofer)의 도움으로 전면의 바로크 양식의 부분을 증축했다. 새 궁전에는 황실에서 보는 대리석 홀, 거울룸 그리고 40개가 넘는 객실이 있다.

역사적으로 1815년에는 나폴레옹군의 루이-알렉산드르 베르시에(Louis-Alexandre Berthier) 원수가 러시아군에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망명 중이던 그리스왕실의 오토 1세(Otto I)와 아말리(Amalie) 여왕이 거처했다. 

르네상스 양식의 전면 건물의 배후로 뻗은 2개의 날개 사이에 장미정원(Rosengarten)이 있다. 정미정원이 조성되기 전에 이 장소는 16세기 무렵 조성된 르네상스 정원이었다. 쇤보른의 프리드리히 카를 주교후는 1733년에 르네상스 정원을 바로크 양식의 정원으로 개조했다. 정원은 건축가 발타사르 노이만(Balthasar Neumann)이 설계했고, 로코코 양식의 정원 전시관은 건축가 요한 아콥 미카엘 퀴첼(Johann Jakob Michael Küchel)이 지었다. 정원에 서 있는 고대 신화의 조각들은 페르디난트 티에츠(Ferdinand Tietz)가 1760~1761년 사이에 제작한 것이다. 장미정원에는 4500그루의 장미나무가 향기 진한 꽃을 피워낸다. 


장미정원의 테라스에 서면 언덕 아래로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의 붉은 지붕을 조망할 수 있으며, 서쪽으로 장크트 미카엘 수도원과 교회를 볼 수 있다. 미카엘언덕 위에 있는 미카엘 수도원(Kloster Michelsberg)은 하인리히 2세에 의해 밤베르크 주교 관구가 설립되고, 밤베르크 최초의 주교로 부임한 에버하드(Eberhard)가 1015년에 주교 개인의 소유로 미카엘 성인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하인리히 2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수도원은 발전을 거듭했다. 12세기 들어 교황청의 지원과 함께 대수도원은 주교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얀 후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대수도원을 해산했다. 1446년 대수도원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밤베르크의 주교는 대수도원장을 면직시키고 대수도원을 장악했다.

대수도원은 1525년 독일 농민전쟁과 1553년의 마그레이브 전쟁(Markgräflerkrieg)으로 피해를 입었다. 30년 전쟁 기간 중에는 스웨덴군이 수도원을 수년 동안 점거했다. 17세기와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대수도원은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1803년 교회의 세속화가 일어났을 때 대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밤베르크 도심에 있던 카타린넨과 엘리사베텐 연합병원(Vereinigtes Katharinen- und Elisabethen-Spital)이 옮겨와 지금까지 진료를 하고 있다.

미카엘 언덕에는 장크트 미카엘 교회도 들어서 있다. 미카엘 성인에게 헌정된 최초의 교회는 1015년 무렵 에버하르트의 주도로 짓기 시작해 1021년에 아리보(Aribo)와 필그림(Pilgrim) 주교, 하인리히 2세를 비롯한 신성로마제국의 주요인물들이 참가한 가운데 봉헌됐다. 최초의 교회의 규모나 구조에 관하여 남아있는 기록이 별로 없다. 

1117년 지진으로 교회가 일부 피해를 입었는데, 오토(Otto) 주교에 의해 재건축이 추진됐고, 1211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새 교회가 봉헌됐다. 1610년 지붕을 수리하다가 지붕이 대규모로 파괴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요한 뮐러 대수도원장(Johann V. Müller)의 주도로 재건축이 추진됐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새 교회는 1617년에 봉헌됐다. 1696~1700년에는 대수도원장 구텐베르크의 크리스토퍼 에른스트(Christoph Ernst von Guttenberg)에 의해 바로크 양식의 2층짜리 외벽이 섰다. 이후로도 교회를 보완하는 공사는 꾸준하게 이어졌다. 

1803년 세속화 과정에서도 교회는 종교 활동을 이어갔다. 수도원에 들어선 병원에서 사용하지 않는 정원 등 교회시설을 일반에게도 개방해왔다. 하지만 2012년 구조적 안전에 문제가 발견되면서 교회는 폐쇄됐고, 2016년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2021년에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카엘교회의 내부에는 천정그림이 특별하다. 본당, 복도, 통로, 횡단 및 서쪽 갤러리의 천장에는 파인애플, 면화, 석류 또는 담배와 같은 이국적인 식물을 비롯해 사과, 배, 검은 딸기 및 토착 나무, 관목 및 잔디 등 총 580개의 식물이 그려져 있다. 

1617년에 4명의 화가가 그렸다고 하는데, 당시 밤베르크에 보관되어 있는 마티아스 드 루벨(Matthias de L'Obel)이 1610~1614년 사이에 만든 식물도감의 원본을 참조했을 것이다. 앵무새 6마리를 비롯한 몇 마리의 새가 천정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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