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자, 정혜’(2005년·감독 이윤기)에서 우편취급소 여직원 정혜(김지수)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낸다. 무기력하게까지 보이는 정혜의 일상 저편에는 15살에 고모부에게 당한 성폭행과 정신과 치료의 아픈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영화는 정혜가 고립 대신 새로운 관계를 찾는 것을 암시하며 끝을 맺지만, 우리 현실과는 좀 다르다. 성폭력 등 목숨을 위협하는 범죄와 사고에 노출되었다 트라우마의 늪에 빠진 이들의 삶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세월호, 포항지진, 고문피해….
공통점은 재난이나 국가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trauma)’일 것이다. 현대정신의학은 트라우마를 죽음, 질병, 재난 등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후 겪는 심리적 외상이라고 정의한다. 최근에는 이별, 왕따 등으로 인한 일 ‘스몰트라우마’에 고통 받는 이들도 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트라우마 관리는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에야 본격화됐다. 현재 정부는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를 주축으로 각 지방자치단체에 트라우마센터를 설립 중이다. 지진, 화산 폭발 등 대형 재해로 인한 트라우마 관리를 일찍부터 시작한 일본에 비해 다소 늦은 시작이지만, 개인의 심리·정신적 문제에 대한 적극적 관리 자체는 큰 의의를 갖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중의 트라우마 이해도와 인식은 낮은 편이다. 심민영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사업부장은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요인이 대형 재난사고로에 한정짓는 경향이 있다”며 “각종 범죄, 비동의 성관계 영상 유출 피해, 성폭력 등 여러 사건이 연관돼 있다”고 설명했다.
왜 트라우마 관리에 국가가 나서야 할까. 심민영 부장은 “개인에게만 맡겨두기에는 트라우마로 인한 악영향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트라우마 자체도 심리적 문제를 일으키지만 우울, 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이 함께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PTSD는 대인관계 등 사람의 여러 기능을 하락시킵니다. 환자 상당수는 ‘나는 변했다’고 토로합니다. 고립감과 외부를 향한 분노는 종국에는 ‘자책’으로 흐릅니다.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사건·사고가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어 궁극적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상당수이죠.”
◇ 트라우마 치료 위한 연구 눈길
정신과적 질환의 조기진단 및 치료가 필요한 이유는 증상의 고착화 때문이다. 진단 및 치료법의 연구는, 그러나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환자 수의 증가는 뚜렷한데, 아직 다른 만성 희귀질환 등과 비교해 그 수가 적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나라의 트라우마 분야는 척박한 게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도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트라우마 진단 및 치료 연구개발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신현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박사겸 감성ICT산업협회장은 “자신이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며 “적기에 치료를 놓쳐 질환이 고착화되어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트라우마 조기진단이 요구된다”고 연구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신 박사는 “트라우마 진단을 위해 자율신경계에서 신경계 반응을 분석해 뇌의 상태를 파악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라며 “아주 쉽게 말하면, 사람이 느끼는 것을 실시간으로 인지·처리해 개인 맞춤형 케어를 실시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관련해 내달 6일 세종컨벤션센터에서 트라우마 포럼도 열린다. 특히 이 자리에는 광주트라우마센터,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포항재난심리지원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 등이 참여키로 했다. 설핏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기관과 단체가 모일 수 있는 이유는 ‘트라우마’의 범주에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신 박사는 “트라우마는 원인에 따라 증상이 달라질 수 있고, 똑같은 원인에도 여러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면서 “참여 기관 및 단체는 실제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혜택이 가는 해법 도출에 의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연구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