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세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세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9-26 12:00:00

쇼팽 기념비가 있는 우지엔키 공원을 떠난 일행은 다음 일정인 바르샤바 구시가로 향했다. 버스가 멈춘 곳은 폴란드 대법원이다. 중세 폴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법체계는 1523년 귀족들이 주도해 만든 민사와 형사소송에 관한 ‘절차법’이다. 이에 따라 1578년 크라운 재판소(Trybunału Koronnego)가 바르샤바 남쪽에 있는 루블린에 설립됐다. 재판소는 입법부나 행정당국과 별개의 조직으로 판사는 매년 귀족회의에서 선출됐다. 즉 폴란드의 민주적 귀족의 정치적 주권자인 귀족의 법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7년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폴란드의 독립이 논의됐다. 독립 폴란드의 국가체계를 재건하며 사법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폴란드 대법원이 설치됐다. 1944~1945년 소련을 배후로 한 폴란드 공산당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전쟁 전의 법적 지위를 선택적으로 유지했다. 제도는 유지하되 구성원을 점진적으로 교체해가면서 폴란드 법체계에 스탈린주의를 통합하는 변화가 이뤄졌던 것이다. 

1917년 처음 설립된 폴란드 대법원(Sąd Najwyższy)은 길 건너 크라신스키 정원(Ogród Krasińskich)에 있는 크라신스키 궁전(Pałac Krasińskich)에 자리했다. 바르샤바 북쪽에 있는 푸오츠크(Płock) 지방관을 지냈으며, 보병연대 사령관이었던 얀 도브로고스트 크라신스키(Jan Dobrogost Krasiński)의 집이다. 네덜란드 건축가 틸만 가메르스키(Tylman Gamerski)의 설계로 1677~1695년 사이에 바로크양식으로 지었다. 

1765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이 궁전을 구입해 재무위원회 건물로 사용하면서 연방 궁전이라고 불렀다. 1766년 크라신스키 정원이 대중에 공개됐다. 하지만 궁전은 1782년 12월 화재로 불탔고, 도미니카 메르리니에고(Dominika Merliniego)의 설계에 따라 1783년 12월에 재건됐다. 

재건된 궁전은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독일 항공기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미에츠스와프 쿠즈마(Mieczysław Kuźma)와 즈비그뉴 스테빈스키(Zbigniew Stępiński)의 설계로 1948년부터 재건을 시작했고, 1961년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지금은 국립도서관의 특별 소장품을 보관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대법원은 다른 정부기관처럼 바르샤바 서쪽에 있는 우치(Łodzi)로 이전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오그로도바(Ogrodowa)에 세운 법원단지로 돌아왔다.

1991년에는 새로운 대법원 청사의 건립 필요성에 따라 설계를 공모했고, 마렉 부진스키(Marek Budzyński)와 즈비그뉴 바도프스키(Zbigniew Badowski) 팀의 설계가 선정돼 크라신스키 광장의 동쪽에 새로 지었다. 설계팀은 대법원 건물의 설계에 “인간의 삶에서 권리의 역할을 설명하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대법원 안에 있는 홀의 기둥에는 로마법의 기초를 이룬 고대 로마의 성문법인 12표법(十二表法, Leges Duodecim Tabularum)을 새겼다. 라틴어 원문과 폴란드어 번역문을 같이 새겼는데, 왼쪽 열의 첫 번째 기둥에 적힌 ‘Si in ius vocat, ito’라는 구절은 ‘법원이 소환한 피고는 출두해야 한다’라는 의미다. 

대법원 건물은 크라신스키 궁전의 옆에서 길 건너편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건물 가운데로 도로가 지날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놓았다. 건물은 72개의 커다란 녹색 기둥으로 둘러싸여있다. 바르샤바의 궁전과 교회의 지붕과 돔에서 볼 수 있는 색깔이다. 겉면에 구리를 피복하는 건축기법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비, 눈, 바람 등이 구리와 반응해 산화시킨 결과로 녹색층이 만들어졌다.

도로를 건너 대법원 건물의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주차장이다. 주차장 쪽으로 열린 작은 공간에는 건물의 2층을 머리에 얹고 있는 3명의 여성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각각 믿음, 희망, 사랑을 상징한다. 이 장소는 바르샤바를 찾는 관광객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팀만이 찾는다고 김영만 가이드가 설명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그러므로 믿음, 희망, 사랑, 이 3가지는 항상 남아 있을 것이며 그 중에 제일 큰 것은 사랑이다’와 관련이 있다. 밀라노에 살던 소피아라는 여성은 코린토 사람들에게 보낸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따라 살았다. 그녀는 3딸의 이름을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삼덕에 따라 피데스(믿음), 스페스(희망), 카리타스(사랑)라고 지었다. 

소피아는 남편이 죽자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로마로 가서 살았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서기 135년, 각각 12살, 10살, 9살이던 소피아의 딸들은 소피아가 보는 앞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목이 베어져 순교했다고 한다. 비잔틴을 중심으로 소피아와 3딸에 대한 사람들의 공경이 커지면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짓기에 이르렀고 그녀들에 대한 신심은 특히 마인 강 북쪽에서 커져갔다고 한다.

유럽 건축의 영향을 받은 건물에서 사람의 형상을 기둥으로 삼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건물을 볼 때마다 엄청난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성을 건물의 기둥으로 삼은 것을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에레크테이온(Ερέχθειο) 신전에서 봤다. 신전 남쪽으로 난 베란다에 6개의 여인상이 머리에 지붕을 받치고 서 있었다. 이 여인들은 카리아티데스(Karyatides)라고 한다. 스파르타 부근에 있던 도시국가 ‘카리아이(Karyai)의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카리아티데스라는 건축양식이 생긴 배경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정설이 없다는 이야기다. 페르시아와 아테네가 중심이 된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전쟁 당시 카리아이가 페르시아 편에 섰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카리아이의 여자들을 모두 노예로 삼았다. 또한 제2의 카리아이가 등장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의미로 카리아티데스라는 건축양식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하지만 델피의 시프노스 보물창고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에 만들어진 건물에서도 카리아이티데스를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딱 떨어지는 설명은 아니다. 카리아이 여성들은 그곳 출신인 헬레나를 닮아 키가 크고 예뻤을 뿐더러 체력과 정신력 또한 강인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건강한 아들을 많이 낳았다고 한다. 고대 사회에서 남성은 중요한 자산이 됐을 터이므로 이런 장점을 가진 카리아이 여성들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카리아이티데스 양식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한편 고대 카리아이 여성들이 아르테미스 여신에 대해 강한 신앙심을 가졌다.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축제가 열리면 갓 꺾은 갈대로 엮은 바구니에 공물을 담아 신전으로 가져가 춤을 추며 열광적으로 경배했다고 한다. 카리아이 여자들의 신앙심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 카리아이티데스 양식이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각설하고, 폴란드 대법원에서 건물을 이고 있는 세 여성을 보고 큰길로 나서면 도로가에 작은 기념비가 서있다. 별다른 설명이 없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르샤바 게토의 경계표지(Pomniki granic getta w Warszawie)였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한 뒤에 설치한 바르샤바 게토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르샤바 시는 바르샤바 게토의 경계 가운데 가장 먼 22곳에 경계표지를 세웠다. 경계표지는 3가지 요소로 구성돼있다. 

첫째, 전쟁 전 바르샤바 시내의 도로망에 게토의 외곽 경계선을 표시하고, 경계표지의 위치를 표시한 60×70㎝ 크기의 청동판이다. 둘째, 표지가 설치된 장소에 대한 정보를 폴란드어와 영어로 적은 아크릴판으로 게토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한 1~2장의 사진을 붙였다. 셋째, 보도 및 잔디밭에 설치된 25㎝의 시멘트 띠에는 ‘MUR GETTA 1940’과 ‘GHETTO WALL 1943’이라는 글씨가 2줄로 새겨진 주철판을 담아 게토 담의 정확한 위치를 나타낸다. 이는 바르샤바 게토의 내역에 대한 글이다. 

“독일 점령 당국의 명령에 따라 게토지역은 1940년 11월 16일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차단됐습니다. 벽으로 둘러싸인 빈민가 지역은 처음에는 307ha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줄어들었습니다. 1942년 1월부터는 작은 게토와 큰 게토의 2곳으로 나뉘었습니다. 약 36만 명의 바르샤바 유대인과 다른 도시에서 온 유대인 9만 명이 게토에 수용됐습니다. 그 가운데 10만 명은 기아로 사망했습니다. 1942년 여름, 독일인들은 트레블린카(Treblinka, 바르샤바에서 동북쪽으로 80㎞ 떨어진 곳)의 가스실에서 약 30만 명의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1943년 4월 19일 게토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5월 중순까지 (게토의) 전투원와 민간인은 전투 중에 혹은 또는 조직적으로 방화한 게토의 건물에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1943년 11월 마이다네크(Majdanek), 포니아토바(Poniatowa) 및 트라브니키(Trawniki) 강제 수용소에서 독일인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난과 싸움 속에 죽은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2008년 바르샤바 시.”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해 2002년 제75회 아카데미상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 그리고 각색상 등을 수상하고, 같은 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당시 바르샤바 게토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있다.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의 저서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여타의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타난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게토의 폐건물에 숨어살던 슈필만은 끝내 호젠펠트라는 독일군 장교에게 들키고 만다. ‘누구냐?’는 물음에 ‘피아니스트였다’라고 답하는 슈필만에게 호젠펠트는 피아노를 연주해보라고 주문한다. 어수선한 폐가에 숨어사는 슈필만이 비참한 몰골을 하고도 살아남기 위해 쇼팽의 발라드 1번 G 마이너를 필사적으로 연주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절정을 이룬다.

나라 없이 떠돌며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은 유대교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생활과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여 살았다. 이런 유대인 공동체에 게토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1516년 독일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베네치아에서 정착허가를 얻은 데서 유래한다. 이들이 자리 잡은 곳은 새로 세운 주물공장이 있어 이탈리아어로 ‘새 주물공장’이란 뜻을 가진 게토 누오보(Ghetto Nuovo)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이어서 터키에서 온 유대인들도 인근에 있는 ‘구 주물공장’이 있는 게토 베키오(Ghetto Vecchio)에 정착했다.

베네치아의 게토가 지금까지의 유대인 거주지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거주에 제한이 생겼다는 점이다. 로마교황청은 베네치아의 게토주변에 높은 벽을 세워 외부 세계와 차단했을 뿐더러 밤이 되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게토의 출입구를 잠그게 했던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게토가 강제로 격리당한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구역을 의미하게 된 배경이다. 현대에서는 빈민가를 이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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