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여섯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여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10-07 00:00:00

왕궁 광장에는 주말을 맞아 놀러 나온 바르샤바 주민들에 관광객들까지 더해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바르샤바 왕궁의 모습을 카메라에 제대로 담으려 욕심을 내다보니 자꾸 멀리 가는 바람에 인솔자와 가이드가 필자를 한참 찾았나보다. 이어폰을 꼽고 있어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일행들이 모여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필자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가이드나 인솔자 입장에서는 인파에 묻힌 필자가 눈에 띄지 않아서 걱정을 했던가 보다. 조심해야겠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김영만 가이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주의를 줬다. 하지만 발트연안국가의 여행부터는 크게 긴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번 프랑스 여행에서 찾았던 몽마르트언덕에서 500유로를 소매치기 당한 뒤로 비상금과 여권을 복대에 넣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여행까지만 해도 옆으로 매는 작은 가방의 안주머니에 비상금을 넣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몽마르트의 재인(才人)은 가방 지퍼를 2번이나 열어야 하고 비좁은 가방 안을 뒤져 비상금만 가져가는 신기(神技)를 부린 셈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든 소 잃고 외양간은 확실하게 고친 셈이다.

왕궁 광장에서 대통령궁 옆에 있는 아담 미키에비츠 광장(skwer Adama Mickiewicza) 방향으로 가려면 비스와 강에 걸린 쉴라우스코 돔브로브스키(Most Śląsko-Dąbrowski) 다리와 연결되는 도로 위에 걸린 커다란 보도를 건너야 한다. 보도를 건너가면 크라코프스키에 프르제드미시치에(Krakowskie Przedmieście) 거리의 왼쪽에 전망대가 서 있다. 성 안나 교회의 종탑이다. 가까이는 왕궁 광장을 굽어보고 멀리는 비스와 강 건너까지 조망할 수 있다. 입장료는 6즈워티(złoty, ‘금’을 의미하는 폴란드어로, 약자로는 ‘PLN’이라고 적는다. 2019년 9월 14일 환율을 적용하면, 1PLN은 302원)이다.

종탑 옆에 있는 바르샤바 성 안나 교회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외관을 가진,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 가운데 하나다. 1788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1454년 리투아니아의 루테니아 출신인 마조프셰 공작 안나 피오도로브나(Anna Fiodorowna, 어떤 책에서는 홀스자인스카(Holszanska)라고 잘못 기술하기도 함)가 시토 수도원을 건설했다. 1578년에는 안나 야기엘론카(Anna Jagiellonka) 여왕이 웅장한 모습의 종탑을 세웠다. 1578년부터 1621년 사이에는 교회 앞 광장에서 프로이센의 통치자가 폴란드 군주에게 엄숙한 경의를 바치는 의식을 거행했다.

성 안나 교회는 1603년, 1634년, 1636년, 1667년 등에 걸쳐 여러 차례 재건됐다. 스웨덴과 독일군의 침공 당시 약탈을 당하기도 했다. 1740~1760년 사이에는 야굽 폰타나(Jakub Fontana)의 설계에 따라 전면을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축했으며, 이때 2개의 선조 종탑으로 장식됐다. 당시 교회의 벽과 반원형의 천정에는 환상적 기법을 적용해 안나 성인의 삶을 묘사한 그림으로 장식했다.

1788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 포니아토프스키(Stanisław August Poniatowski)의 명령으로 교회를 재건했다. 크리스티안 피오트르 아이그너(Krystian Piotr Aigner)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했고, 조각가 야쿠브 모날디(Jakub Monaldi)와 프란치스젝 핀크(Franciszek Pinck)는 전면을 장식하는 4명의 복음사가 상을 조각했다. 교회의 내부는 수많은 프레스코화로 장식돼있으며,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된 여러 개의 예배당이 있다. 1939년 바르샤바 공습으로 교회의 지붕이 심하게 훼손됐고,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중 화재로 파괴됐지만 곧 수리됐다.

성당 안을 보기 위해 들어갔지만, 마침 혼배 미사가 열리고 있어 입구에서 조심스럽게 내부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본당 입구 바닥에 새겨진 AD1886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성 안나 교회에서 나와 맞은편으로 난 거리를 따라갔다. 처음 만난 사거리에서 건너편에 시선이 꽂혔지만, 걸려있는 간판이 없어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원고를 정리하면서 알아보니 여러 종류의 관공서가 들어있는데, 환전소(MoneyGram. Międzynarodowy), 제약 검사원(Kamienica Jacka Małachowskiego), 그리고 사회보험의 바르샤바 제1지점(ZUS I Oddział w Warszawie) 등이 들어있었다. 특히 이 장소는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저항군이 희생된 장소로 ‘폴란드의 피로 신성화된 장소(Miejsce Uświęcone Krwią Polaków)’라고 표시돼있다.

이곳에서 방향을 바꿔 대통령궁으로 가기로 했다. 대통령궁은 성 안나 교회에서 크라코프스키에 프르제드미시치에 거리를 따라 350m 정도 내려간 남쪽에 있다. 대통령궁은 폴란드-리투아이나 연방시절 최고사령관에 해당하는 ‘위대한 크라운 헷만(Hetman wielki koronny)’을 지낸 브로디(Brody) 출신의 스타니스와프 코니에크폴스키(Stanisław Koniecpolski)가 1643년에 지은 바로크 양식의 코니에크폴스키 궁전(Pałac Koniecpolskich)이 있던 자리다.

지그문트 기둥을 설계한  콘스탄티노 텐칼라 (Constantino Tencalla)의 설계로 시작한 건축은 코니에크폴스키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했고, 완공 뒤에도 여러 귀족들에게 소유권이 거듭 이전됐다. 1791년 5월 2일에는 폴란드 공화국의 5월 3일 헌법(유럽 최초의 헌법이다)을 준비하려던 하원의원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1818년 러시아가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는, 총독의 관저로 사용했는데, 1852년 화재로 전소됐다가 1856년에 재건됐다. 1918년 폴란드가 독립한 뒤로는 총리와 장관 위원회가 자리했다. 1939년 독일 침공과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및 독일군의 퇴각과정에서도 크게 손상을 입지 않은 몇 안 되는 정부소유 건물이다. 1945년 12월 각료회의 상임 위원장이 사용했고, 1947~1952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보수됐다. 1965년,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Józef Antoni Poniatowski) 왕자의 기마상이 세워졌다. 1990년 시작된 보수공사가 끝난 뒤인 1994년부터 폴란드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

포니아토프스키 왕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마지막 국왕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조카다. 폴란드가 러시아,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시절 이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끌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에서 임관된 뒤, 나폴레옹이 주도한 바르샤바 공국의 방위군 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폴란드 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역사의 흐름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탁월한 그의 용병술을 인정한 러시아도 그를 러시아군에 영입할 의사를 타진했지만, 끝내 외면했고, 조국 폴란드를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다했다. 폴란드 사람들에게 포니아토프스키 왕자는 구국의 영웅이다. 

대통령궁의 왼쪽에 있는 교회는 일반적으로 카르멜교회(Kościół Karmelitów)라고 부르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가정 교회(Kościół Wniebowzięcia NMP i św. Józefa Oblubieńca)다. 1643년 현재의 장소에 카르멜 수도회를 위한 목조교회를 세웠던 것인데, 1650년대 폴란드를 침공한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의 독일인들이 불태웠다. 

카르멜 수도회는 우리나라에서는 가르멜회(라틴어: Carmelitae)로 알려져 있다. 가르멜회 혹은 가르멜 산의 성모 형제회는 12세기 무렵 가르멜 산에서 설립된 가톨릭교회의 수도회다. 하지만 그 기원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여전히 분명치 않다. 

1661년 성십자가 교회를 세운 폴란드 주교 미카일 스테판 라지요프스키(Michał Stefan Radziejowski)의 뜻에 따라 유제프 시몬 벨로티(Józef Szymon Bellotti)의 설계에 따라 1692~1701년 사이에 교회의 기본 구조를 지었다. 교회의 전면은 1761~1783년 사이에 바르샤바에서 가장 유명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는데, 설계는 독일 건축가 에프라임 에스제트리거(Efraim Szreger)가 맡았다. 

로코코 양식의 제단과 금도금 그리고 치장벽토의 천정장식 등 교회 내부는 아주 화려하다. 대표적인 폴란드 화가 프란치젝 스물글레비츠(Franciszek Smuglewicz)의 제단 그림을 비롯해 시몬 체코비츠(Szymon Czechowicz)의 그림들로 내부를 장식했다.

1864년 봉기 시에 러시아 사람들이 잔인하게 파괴했던 것을 차르 정권의 배상으로 복구했다. 이후 바르샤바 대교구의 신학교로 이용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큰 파손 없이 보존됐기 때문에 성 요한 대성당이 재건되는 동안 바르샤바 가톨릭교회의 성전 역할을 다했다.

카르멜 교회의 왼쪽에 있는 잘 가꿔진 정원은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 광장이다. 정원 안에는 19세기 폴란드의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아담 미키에비츠(Adam Mickiewicz)의 동상이 있다. 이 분의 동상은 크라쿠프의 중앙광장에서도 만난 적이 있다. 바르샤바에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기념비는 1897~1898년 사이에 조각가 치프리안 고데브스키(Cyprian Godebski)가 제작했다. 

4.2m 높이의 청동상은 이탈리아 피스토이아(Pistoia)에서 주조됐고, 붉은 화강암 기단과 기둥은 밀라노 인근의 바베노(Baveno)에 있는 이탈리아 회사에서 제작했다. 기념비는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898년 12월 24일 1만2000명이 모인 가운데 공개됐다. 러시아 당국은 기념비 제막식이 폴란드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할까 두려워 모든 행진과 연설을 금지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가 진압된 뒤에 나치 독일은 기념비를 일부러 파괴하고, 철거된 기념비 조각들을 독일로 옮겼다. 전쟁 후 폴란드 군인들이 함부르크에서 동상의 머리와 기타 부분들을 발견했다. 조각가 얀 슈체프코프스키(Jan Szczepkowski)가 원래 조각상의 사본을 만들었고, 기념비 주변도 복원을 마친 다음 1950년 1월 28일에 다시 제막됐다.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율리우스 스오바츠키(Juliusz Słowacki), 지그문트 크라신스키(Zygmunt Krasiński) 등과 함께 폴란드의 낭만주의의 3대 음유시인(trzej wieszcze)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정확하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시절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가 지금은 벨로루시에 속하는 자오세(리투아니아어; Zaosė)에서 태어나 빌뉴스에서 대학을 다니고 카우나스에서 교편을 잡은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해체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 작품에도 반영됐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극 ‘선조의 밤(Dziady)’ 중 2-4부는 생전에 출판됐지만 1부는 완성되지 못했다. 또한 애국 서사시 ‘판다 타데우tm(Panda Tadeusz)’는 “리투아니아! 나의 조국이여!(Litwo! Ojczyzno moja!)”로 시작하는데, 이 시는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앞둔 시점에서의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그린 서사시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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