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아홉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아홉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10-21 01:05:38

국경마을 마모노보를 지나자 외교부에서 보내는 안내문자가 도착했다. 해외여행에 관한 일반적인 안내에 더해 방사능 오염지구에 가지 말라는 내용이 추가돼있었다. 금년 7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전한 ‘시베리아의 몰디브’라는 노보시비르스크의 인공호수에 관한 뉴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이 호수는 터키옥처럼 아름다운 청록색 물빛으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인데, 사실은 인근에 있는 화력발전소에서 나온 칼슘염과 다른 금속 산화물이 흘러들어 빚어낸 것이라고 한다.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발전소에서는 “호수의 물이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호수의 바닥에는 발전소에서 폐기된 석탄재가 쌓여 늪을 이루고 있다는데, 잘못 들어갔다가는 남의 도움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발전사의 이런 경고가 오히려 위험한 장소를 세상에 알리는 효과를 불러와 인증샷을 찍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필자 역시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안전 불감증이 심각해지는 경향은 세계적인 현상인가 보다.

마모노보에서 칼리닌그라드까지는 버스로 40여분 걸렸다. 칼리닌그라드는 그다인스크만 안으로 형성된 비스툴라 석호(Калининградский залив)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칼리닌그라드(러시아어: Калининград, 독일어: Kaliningrad)는 러시아의 월경지인 칼리닌그라드주의 주도이며, 비스툴라석호를 통해 발트해와 연결되는 항구도시다.

칼리닌그라드주는 서쪽은 발트해로 열려있고, 북쪽은 리투아니아 그리고 남쪽은 폴란드와 국경을 나누는 쐐기모양의 지역으로 리투아니아를 지나 라트비아 혹은 벨라루시를 경유해야 본토인 러시아에 갈 수 있다. 2019년 기준으로 인구는 48만2443명이며, 주민의 87.4%는 러시아인이다. 우크라이나인이 4.0%, 벨로루시아인이 3,7%로 뒤를 잇고 있다. 그밖에도 아르메니아, 타타르, 리투아니아, 독일인, 폴란드 사람이 1% 미만의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칼리닌그라드는 1256년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2세(체코어: Otakar II)의 명에 따라 튜튼기사단이 성을 건설하고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라고 했다. 이전에는 칼리닌그라드의 북쪽에 있는 삼비아 반도에 살고 있던 옛 프로이센 부족의 일파인 삼비아(Sambia) 부족이 건설한 텅스테[Twangste(Tuwangste 혹은 Tvankste라고도 하는데, 참나무 숲이라는 뜻이다)라는 요새가 있었다.

게르만 부족을 중심으로 성장한 쾨니히스베르크는 한자동맹의 일원이 됐고, 1457년에는 튜튼 기사단의 본부가 세워졌으며,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가 됐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프로이센왕국을 열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1세라는 이름으로 초대 왕으로 즉위식을 올렸다. 쾨니히스베르크는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였으며 베를린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서 역대 왕의 대관식은 이곳에서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이 지역은 독일의 월경지로 남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에는 영국공군의 대규모 폭격이 있었고, 1945년에는 소련군이 진주해오면서 벌어진 공성전으로 도시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1940년 37만명이던 도시 인구가 전쟁이 끝난 1945년 봄에는 5만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나마 남았던 독일인 주민들이 1948년까지 대부분 추방되면서 러시아인들이 이주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쾨니히스베르크는 15개로 구성된 소비에트 연방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됐다. 1946년 사망한 최고소비에트 의장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을 바꿨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발트해에 연한 칼리닌그라드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소비에트 연방 해군의 주력인 발트 함대가 칼리닌그라드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고 바르샤바 협정이 종료되면서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의 본토와 떨어진 월경지가 됐다. 2004년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칼리닌그라드주는 고립되고 말았지만, 러시아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영토로 인식되고 있다. 2018년 러시아에서 열린 월드컵경기의 일부를 칼리닌그라드에서 연 것은 칼리닌그라드가 러시아의 영토라는 것을 서방세계에 각인시키려는 러시아의 깊은 뜻이 담긴 것이라 하겠다. 

4시 반에 버스가 선 곳은 칼리닌그라드 중심가의 북쪽에 있는 호박박물관(Музей янтаря)이다. 베르크니 호수(Верхний пруд, 위쪽 호수라는 의미)가에 있는 호박박물관은 옛 요새의 일부인 돈탑(Башня Дона)에 조성한 것으로 1979년에 개관했다. 돈탑은 가까이 있는 장미정원 문(Roßgärter Tor)과 함께 1854년에 지어진 쾨니히스베르크의 방어요새의 일부로 요새를 건설한 프로이센 야전군의 카를 프리드리히 에밀 주 도나-쉴로비텐(Karl Friedrich Emil zu Dohna-Schlobitten)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호박박물관은 28개의 전시장이 3개 층에 걸쳐 배치돼있어 총면적이 1000㎡에 달하며, 1만4000점의 호박관련 물품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장은 모두 5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1)호박의 기원과 특성, 2)호박의 역사와 고고학 지식, 3)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예술 분야에 나오는 호박, 4)칼리닌그라드에서 호박가공이 발전해 온 역사, 5)현대 미술에 등장하는 호박에 관한 것들을 다루고 있다. 

호박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소장품 가운데 세계에서 2번째로 큰 4280g에 달하는 호박덩어리와 높이 1.2m에 달하는 ‘풍요’라는 이름의 꽃병, 그리고 작은 도마뱀이 들어있는 호박 등이 볼만하다. 칼리닌그라드에서 가까운 얀타른(Янтарном) 마을이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 호박의 90%를 차지하는 발트 호박이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호박박물관이 칼리닌그라드에 생긴 것이다. 

호박(琥珀)은 진주, 산호와 함께 광물이 아닌 보석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나무가 상처를 입었을 때 내는 수액이 땅에 묻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만들어지는데 적어도 100만년이 걸린다고 한다. 북유럽과 도미니카공화국의 해변에서 많이 발견된다. 호박의 연대를 측정해보면 보통 3000만~9000만년 정도의 옛날에 생성된 것이다. 

호박은 장식품이나 절연재로 사용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노리개나 비녀, 마고자 단추 등 장신구로 사용돼왔다. 우리나라에서는 투명하고 노란색 호박은 금패(錦貝)라 하고, 투명하지 않으면서 누런색 호박은 밀화(蜜花)라고 한다. 

호박에는 고대의 생물들이 갇혀있는 경우가 많아 고생물학자들의 관심이 되고 있는데,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는 호박 안에 갇혀있는 모기의 피에서 추출한 공룡의 DNA로 멸종된 공룡의 복원한다는 놀라운 상상력을 선보였다.

호박박물관이 있는 돈탑과 성벽으로 이어지는 장미정원 문(Roßgärter Tor)은 칼리닌그라드에 남아있는 옛 요새의 성문 7개 가운데 하나다. 17세기가 시작될 무렵 만들어졌던 옛 성문을 대체할 목적으로 빌헬름 루트비히 스튀르머(Wilhelm Ludwig Stürmer)의 감독 아래 1852~1855년 사이에 건설됐다. 

가운데 폭 4m의 중앙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2개의 높은 팔각형 포탑을 세웠으며 각각 3개의 엄호용 포대가 있다. 중앙 통로의 아치의 꼭대기 양쪽에는 프로이센 장군인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와 아우구스트 나이드하르트 폰 그네이세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의 모습을 새긴 둥근 메달을 걸었다. 전쟁 당시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했는데, 지금은 태양의 돌(Солнечный камень)이라는 카페가 들어있다. 

김영만 가이드는 발트연안 국가 어디를 가더라도 호박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호박박물관에 입장할 것까지는 없다면서 박물관 주변과 베르크니 호수를 돌아보는 자유시간을 줬다. 박물관에서는 그저 화장실을 사용하는 편의만 얻은 뒤에 호수 구경에 나섰다. 점심 무렵부터 하늘을 가리기 시작한 구름이 비를 뿌리지는 않았지만, 구경에 나설 무렵 구름이 두터워지는 듯해서 우산을 챙겼다. 

베르크니 호수는 북쪽으로 두 개의 만이 있어 약간은 불규칙하지만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이 900m 동서가 100~390에 달하며 면적은 0.411㎢에 달한다. 베르크니 호수와 남쪽에 있는 니주니 호수(Нижний пруд, 아래 호수라는 의미)는 튜턴기사단이 흙댐으로 프레골강의 지류를 막아 만든 인공호수이다. 니주니 호수는 1256년에, 베르크니 호수는 1270년에 만들었다. 

베르크니 호수 서쪽은 청소년 유원지(Парк аттракционов Юность Калининград)가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호수 주변으로 산책로가 잘 조성돼있어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을 해봤지만, 호수 북쪽으로 굽어드는 물굽이가 길어지면서 집합시간에 대어가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에 접고 말았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단풍 든 숲속에서 만난 두 갈래 길에서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가지 않기로 한 길을 끝까지 바라봤다고 했다. 그런데 베르크니 호수의 동쪽 호안에서 아내와 나는 손에 잡힐 듯 한 서쪽 호안을 그저 막막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신나는 악대의 연주소리가 호수를 건너왔고, 남쪽에는 무언가 볼만한 것이 있을 듯해서 말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바로 그곳에 조각가 헤르만 틸레 (Hermann Thiele)가 1913년에 설치했다는 해마, 코끼리 물개, 바다 개, 바다사자 등 4종의 해양 동물 조각들이 있다고 했다. 5시에 모여 다음 일정인 쾨니히베르크 대성당으로 향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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