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공직선거법 개정안 처리가 연기될 조짐이다.
앞서 문희상 국회의장은 27일 국회 본회의에 선거법 개정안 부의를 천명하며 여·야가 한정된 시간이지만 충분한 논의를 통해 합의점을 도출해달라고 당부했다. 여야4당 원내대표들 또한 내년 총선 예비후보 등록일인 12월 17일 이전에는 선거구 획정이 이뤄져야하는 만큼 부의 후 즉시 처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안건 부의를 하루 앞둔 26일까지 여·야 정당은 합의에 도달하기는커녕 양극단에서 단 한 발짝도 양보하지 못한 채 시일만 보냈다. 정당들의 속내가 서로 다른데다 복잡한 셈법 때문에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오히려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단식에 돌입하며 발을 빼는 모습까지 보였다.
문제는 법안 처리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26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 같은 극한 대립 속에서 개정을 거부하는 자유한국당을 제외하고도 연대를 이룬 여야4당 내에서조차 의견이 갈리며, 표결까지는 시일이 더 필요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오전 원내대책회의에서 “앞으로 일주일이 국회의 모든 지도자가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하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모든 야당에 일주일간의 집중적인 협상을 제안한다”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관련 법안이 부의되는 12월 3일까지 선거법 개정논의를 마무리하자는 뜻을 전했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도 26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 회동에서 27일 선거법 개정안 합의처리방안을 논의했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는 입장을 전하며 “부의라는 것이 상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은 좀 더 논의하기로 했다”며 사실상 27일 본회의 상정이 어렵게 됐다는 말을 남겼다.
◇ 한국, “법안무효… 철회” vs 민주, “합의원칙… 강행”
상황이 이처럼 악화된 데에는 한국당의 극렬한 반대가 큰 몫을 차지했다. 당장 황교안 당 대표는 일주일이 넘는 단식을 이어가며 비례대표제 폐지 등 선거법 개정과는 정반대 방향의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나경원 원내대표 또한 “협상의 끈을 놓지는 않겠지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을 철회하고 논의하는 것이 진정한 협상”이라며 무효선언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나아가 자유한국당 소속 여상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은 26일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선거법 부의를 연기해야한다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선거법 개정안에 중대한 법률적 하자가 있는데다 이와 관련 헌법재판소에서 재판을 진행 중인만큼 재판결과가 나올 때까진 본회의에 부의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당내 의원들 사이에서도 패스트트랙에 올라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관련 법안과 함께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에서는 범여권 연대와 타협해 공수처법을 통과시키더라도 선거법 개정만은 막자는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공수처가 설치된다 해도 당장의 타격은 없을뿐더러 사안이 불거졌을 때 대응을 해나갈 수 있지만, 정당지지율에 좌우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될 경우 당장 내년 총선에서 지역구 의석이 줄어들고 한국당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만큼 기필코 막아야한다는 의도다.
하지만 한국당의 요구를 여야4당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법안을 발의하며 적극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는 정의당은 다양한 국민들의 뜻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의 대표성을 높인다는 장점을 내세워 지역구 225석과 비례대표 75석으로 나눈 심상정 대표안을 원안대로 처리하자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도 ‘합의처리’를 원칙으로 하되 한국당이 끝까지 협상을 거부하고 패스트트랙 철회요구나 선거법 개정반대만을 주장할 경우 한국당을 제외하고 법안처리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이미 밝혔다. 이에 맞춰 정의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에 창당을 준비 중인 대안신당을 포함해 ‘4+1’ 공조체제를 갖추고 국회 본회의 의결정족수 148명 확보에도 나섰다.
◇ 정당 간 복잡한 셈법에 선거법 개정, ‘무늬만 개혁’ 우려도
지금의 추세라면 ‘4+1’연대 결성으로 선거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 시 통과 가능성은 높을 전망이다. 이탈표가 없다는 가정 하에 재적인원 295명 중 민주당이 129석, 정의당이 6석, 민주평화당이 5석, 대안신당이 10석을 차지하고 있어 과반인 148명보다 2석이 많은 150석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국회의장직을 수행하며 무소속이 됐지만 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있던 문희상 국회의장과 민주당에 속했던 손혜원 의원,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를 포함한 당권파 일부 의원들을 비롯해 무소속 의원들 일부까지 동조세력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어, 한국당의 협조 없이 표결에 의한 통과도 충분하다는 계산이다.
관건은 개정과정에서 비례대표 비율을 어디까지 확대할 것이냐는 것을 두고 연대를 이룬 정당들 간에도 의견이 다르다는 점이다. 당장 본회의에 부의된 개정안을 발의한 심상정 의원이 대포로 있는 정의당의 경우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225대 75로 하는 원안을 고수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호남기반의 민주평화당과 대안신당은 지역구 의석을 더 늘려야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당도 원안상정의 뜻을 대내외적으로는 내놓고 있지만 의석 조정이 가능하다는 협상의 여지 또한 내비치고 있다. 지역구 축소에 따른 민주당 내부 의원들 불만을 위해 일정부분 양보도 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일부에선 공수처법 통과를 위한 소수정당들과의 협상카드인 만큼 민주당 입장에선 어찌됐든 좋다는 속내도 품고 있다고 관측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각각 240석과 60석 혹은, 250석과 50석으로 하는 안이 타협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의당에서도 10% 내에서의 조율가능성을 시사하며 230석과 70석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크게 호응을 얻지는 못한 상황이다. 오히려 선거가 임박한 만큼 지역구 변화가 거의 없는 ‘250+50’안을 채택하자는 의견에 무게가 쏠리고 있다.
평화당 한 관계자는 “지역구 250석·비례대표 50석으로 하되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가면 민주당과 평화당, 바른미래당 당권파, 대안신당까지도 무조건 찬성일 것”이라며 “정의당 입장에서도 연동형 적용 비율을 높이면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현재로선 가장 무난한 선택”이라는 전망을 연합뉴스를 통해 내놓기도 했다.
바른미래당 소속 한 중진의원 또한 “지금으로썬 ‘250+50’안이 가장 유력하다고 본다”며 “비례대표가 3석이 늘어날 뿐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을 수 있지만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와 그 이상이 되면 영향을 받는 지역구가 크게 늘어나 영향을 받는 지역구 의원들의 이탈로 인해 부결될 가능성까지 있어 그 이상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하기도 했다.
한편 정치권의 이같은 흐름에 정치평론가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념적 성향을 벗어나 ‘밥그릇 싸움’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바른미래당 의원의 지적처럼 선거법 개정안의 취지가 다양한 국민의 뜻이 보다 명확하게 국회에 전달될 수 있도록 비례대표의 비중을 높이자는 것인데 3석을 늘리는 것은 ‘생색내기’에 불과한 말 뿐인 개혁이라는 것이다.
한 진보성향의 정치평론가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정의당이나 소수정당들이 정당지지율을 확보해 의석을 늘려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복심은 이해하지만 굳이 이번 총선을 겨냥해 급박하게 개정할 것이 아니라 충분한 협의를 통해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할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