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가빠 온다. 20분 내 음식을 전달한다 했는데, 벌써 17분이나 늦었다. 가방 속 느껴지던 음식의 온기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렸다. 겨우겨우 목적지인 아파트 단지를 찾았다. 한시름 놓은 듯했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깜깜한 밤, 107동이 어딘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드넓은 아파트 단지를 다 헤집고 돌아다녔다. 등과 목덜미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파가 몰아쳤던 지난달 31일, 오후 8시께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 기자는 난생처음 배달 일을 하며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이윽고 107동이 눈에 들어오자 신대륙을 찾은 듯 환호가 터져 나왔지만, 이미 예정 시간보다 30분이 늦은 후였다. 문 뒤의 화난 손님 얼굴을 상상하니,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장갑은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손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음식을 건네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님과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왜 이리 늦으셨어요”라는 말에 “일이 처음이라 좀 헤맸습니다”라는 변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축 처진 기자의 목소리에 동정심이 통했던 걸까. “고생하셨어요”라는 손님의 말이 들려온다. 황급히 내려와 내 배달 수단인 자전거 옆에 기대, 연신 한숨을 몰아쉰다. 그렇게 생애 첫 배달을 마쳤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강남 거리로 나선다. 2020년 새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각. 주점과 음식점의 네온사인은 형형색색 빛났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배달 기사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여전히 거리를 쉼 없이 내달렸다. 자신 또는 누군가의 생계를 위해서다. 기자는 오토바이 위에서 새해를 맞는 그들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싶었다.
수일 전 기자는 크라우드소싱(Crowd Sourcing)인 ‘배민커넥트’에 등록해 간단한 배달 기사 교육을 받았다. 오토바이, 자전거 등의 운송 수단을 가진 일반인이 원하는 날과 시간을 선택해 근무하는 방식이다. 교육을 마친 후 관련 앱을 설치하면, 배달 주문 등이 들어오고, 기사는 거리 등을 고려해 배차 신청을 한다. 앱 내 지도에는 ‘픽업지’와 ‘전달지’의 경로가 표시된다. ‘벨을 누르지 말아 달라’, ‘오기 10분 전 문자를 달라’ 등의 고객 요청사항도 나타난다.
기자가 두 번째로 선택한 주문은 마트에서 식료품을 받아 문고리에 걸어달라는 것이었다. 속도가 중요한 음식을 전달하면 받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대신 부담이 적은 물건 배달을 택했던 것. 사평역 인근에서 곧장, 해당 마트가 있는 신논현역으로 내달렸다.
배달 거리 2km 이내는 가급적 20분 이내에 도착해야 한다. 이미 마트 안은 배달 기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머리가 희끗한 베테랑 기사부터, 20대 30대의 청년까지 다양했다. 1분 1초, 속도가 생명인 이들은 다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트 내부서는 주문 들어오는 식료품들을 봉지로 포장하는 데 바빴다. 콜라, 라면, 과자 몇 개도 배달을 시킨다는 걸 기자는 처음 알았다.
“주문번호 뒷자리 ○○○○번요. 빨리 물건 주세요.”
해당 마트에선 주문번호 확인을 거친 후, 각각 포장한 물건을 배달기사에게 전달했다. 혹시라도 주문번호가 다른 물건을 배송하는 일이 발생하면, 다른 기사까지 피해가 생긴다. 누군가는 다시 헛걸음을 해야 한다. 여기저기서 주문번호를 확인하려는 배달기사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2019년의 마지막 날, 가장 치열한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마트서 내려가는 길, 어렵게 몇몇 기사들에게 말을 붙여볼 수 있었다. 배달 일을 처음 시작한다고 하자, “처음에는 돈 벌 생각 말고, 사고 안 나는 것이 중요하다“, ”옷 입은 걸 보니, 배달로 성공하긴 힘들 것 같다“등의 조언이 이어졌다. 어떤 배달 기사는 오늘이 2019년의 마지막 날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새해가 무슨 의미인가”라며 웃는다.
핸드폰을 보니 10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 10도에 육박했다. 기사들은 터져 나오는 입김을 헬멧으로 가린 채, 오토바이 등을 타고 다시 도심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들에게 12월 31일은 그저 일이 많이 몰리는 날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기자도 장난으로 시작한 게 아닌 만큼, 새해가 열리는 새벽까지 앞으로 10건은 더 해내리라 마음먹었다.
다시 20분 내에 배달을 성공시켜야 한다. 자전거 핸드폰 거치대의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질주를 시작했다. 2019년의 마지막 밤공기는 유난히 차갑고 습했다.
[배달하다 새해를 맞다 ②]에서 계속.
한전진 기자 ist1076@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