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김영갑의 특별한 제주사랑

제주도에서 1년…김영갑의 특별한 제주사랑

58년 개띠 퇴직자의 제주도 1년 살기…스물여덟 번째

기사승인 2020-01-25 00:00:00

새해 들어 제주 생활은 조금 지루하다. 발의 생김새가 문제인지 아니면 신발이 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걷는 거리가 10 km를 넘으면 발바닥과 발가락에 물집이 생겨 사나흘은 집에서 쉰다. 겨울비를 핑계 삼아 집에 있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집에서 쉬니 나가서 제주를 보며 걷는 날보다 집에서 지내는 날이 훨씬 많다.

지루함을 깨기 위해 새로운 식당을 찾아 나섰다. 발에 생긴 물집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걷기는 피하고 세화오일장 구경을 갔었다. 늘 가던 도다리 전문점에 가서 점심을 할까 생각하며 세화장 안쪽의 마을길 산책 중에 중화요리집이 보였다. 오랜만에 짜장면이나 먹어보자고 들어섰다. 식당 안이 깔끔하다. 식탁 위에 끈적거림도 없다. 모든 집기는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도심에서도 이렇게 정돈된 중화요리집 만나기는 쉽지 않다. 짜장면보다 짬뽕 메뉴가 더 많으니 이 집은 짬뽕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집인 듯했다.

손님을 맞이하고 주문을 받고 식사를 내오고 식탁을 정리하는 이는 한 사람이었는데 단 한순간도 가만히 서 있지 않았다. 끝없이 닦고 정리하고 손님들 요청사항 들어주면서도 손님 일어나 나간 자리는 순식간에 깨끗이 치웠다. 잠시라도 식탁 정리가 밀리면 주방에서 다른 직원이 나와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이집 음식은 일부러 찾아와 먹을 만했다. 세화의 도다리 전문점 ‘일미도’에 새로운 선택지로 중화요리 식당 ‘다래향’이 추가 되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나 생각은 온통 3층 아래의 어머니 병실에 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그렇게 벙긋벙긋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두어 시간 후에 다시 내려갔다. 어머닌 앉아 있기가 피곤했는지 잠들어 있었다. 간병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머니 오른쪽 팔다리에 마비가 와 있다’고 한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니 재활치료 잘 받으면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말라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의식을 회복하기만 하면 다른 걱정거리는 없을 줄 알았다. 후유증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3주가 지났는데 또 다른 걱정거리가 나타났다. 퇴근 후 내려가니 잠에서 깬 어머니가 난감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눈을 맞추며 왼손으로 오른쪽 팔을 들어 올리며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3 주 만에 듣는 힘없고 어눌하며 바람이 새는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하며 병원에 온 아버지와 동생들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오랜만에 집에서 잠을 잤다. 아이들 잠자리 보아주고 자리에 누었는데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전처럼 아이들 등교 준비를 할 때까지는 그랬다. 조금 일찍 출근해 어머니 병실에 들렀다. 어머니는 간병인과 수저를 놓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왼손으로 숟가락을 쥐고 있지만 아직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는다. 간병인이 두어 번 떠먹여 주고 다시 숟가락을 쥐도록 해도 손에 쥘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고개만 가로젓는다. 아들에게 숟가락 사용조차 서툰 그 몸짓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나중에 간병인에게서 들었다.

사는 동안 걱정에 걱정이 끊임없어 그 걱정이 생활이 되어버린 인생인데 시간이 흐르고 흘러 시절이 바뀌어 내 아들 장성하여 나를 보러 오지만 썩는 무가 아까워 오늘도 하영 말려 네게 보낸다는 ‘뒷집 할망’ 이야기를 길 초입의 담장에서 읽었다. 걷는 동안 무밭을 보아도, 버려지는 귤을 보아도, 오름의 호젓한 숲길을 걸어도 ‘뒷집 할망’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날 ‘뒷집 할망’과 함께 바닷가에서 시작해 마을을 지나 무, 배추밭 길을 걷고 귤밭을 지나고 오름을 오르고 내려서 다시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많이 지쳐 있었다. 삼달리 마을 도로를 잠시 걷다가 다시 마을을 벗어나기 전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안내 표지 아래서 올레 3코스의 중간 스탬프를 찍었다. 올레 코스를 이리로 이끈 이유는 이 갤러리에 들러 김영갑이라는 사람을 만나라는 뜻이 분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늦기도 했지만, 물집 생긴 발로 들어가 건성건성 보기는 싫었다.

며칠 뒤 다시 찾은 김영갑 갤러리에서 나는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오름을 보고 왔다. 검은 돌담에 기대어 핀 유채꽃에 스치는 바람이 있었고 그 너머에 하늘이 있었다. 바람은 억새를 흔들고 오름의 능선을 지나 하늘로 올라갔다. 그의 하늘은 강렬하게 타오르기도 하고, 곧 쏟아져 내릴 듯 흠씬 젖은 구름을 힘겨워하기도 했다. 하늘을 떠돌던 바람이 구름을 흔들어 작은 틈을 만들고 한겨울 식은 돌담과 거기에 기댄 나무에 한 줄기 햇빛을 건네고 있었다.

김영갑은 누구보다도 앞서 제주의 바람, 하늘, 오름의 아름다움에 눈뜬 사람이다. 사람들이 한라산과 성산일출봉과 용두암을 보고 제주를 보았다고 말할 때 그는 오름에 올랐고 숲에 들어 제주의 참 모습이 여기에 있노라고 이야기했다. 제주의 바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귀 기울여 듣고, 관심있게 보아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20대 중반이었던 1982년부터 제주를 왔다갔다하며 사진을 찍던 김영갑은 1985년부터는 제주도에 눌러 앉았다. 제주 사람들에게 오름이 어렸을 때는 놀이터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가축을 기르거나 농사를 짓는 일터이고 세상을 떠나서는 묻혀서 흙으로 돌아갈 삶의 터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외지인을 반기는 이 없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사진을 찍었다.

어떤 이는 그가 남긴 사진이 30만장이라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10만장이라 하며 또 어떤 이는 7만장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에게 보여준 사진보다 보여주어야 할 사진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찰나의 아름다웠던 순간이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을 통해 차례차례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20여년 동안 제주 사진을 찍다가 루게릭병이 진행되면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제주도 동남쪽 삼달리의 폐교에 전시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다. 학교의 흔적은 작은 것 하나라도 없애지 않고 남겨 두었다. 운동장은 돌들을 쌓아 아담한 공원으로 꾸몄고 교실 벽엔 사진이 걸렸다. 학교 뒤 숙직실로 쓰였을 듯한 작은 건물은 카페가 되었다. 2002년 갤러리가 공개되었지만 교통이 편리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후미진 시골마을에 사진을 보러 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2005년 그는 제주의 흙이 되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를 본다. 그가 찍은 바람을 보고 느낀다. 그의 사진 작품에 언제 어디서 어떤 카메라를 이용해 어떤 조건으로 찍었는지, 또 작품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사람들은 김영갑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안다.

김영갑이 말한다.
“삶에 지치고 여유 없는 일상에 쫒기듯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서 와서 느끼라고, 이제까지의 모든 삿된 욕망과 껍데기뿐인 허울은 벗어던지라고, 두 눈 크게 뜨지 않으면 놓쳐버릴 삽시간의 환상에 빠져보라고 손짓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주의 진정성을, 제주의 진짜 아름다움을 받아드릴 넉넉한 마음입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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