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투에서 패르누까지는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린다. 92번 국도를 따라 패르누로 향한지 30여분이 지나면 커다란 호수를 만난다. 보르츠야르브(Võrtsjärv)다.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는 페입시 호수를 제외하고 에스토니아 영토에서 가장 큰 호수다. 해발 34.6m에 위치하는 호수는 평균 수위에서 면적 270㎢에 달하고 최대깊이는 6m다.
에스토니아의 남서쪽에 위치한 패르누(Pärnu)는 리가 만의 북동쪽에 오목하니 들어앉은 패르누 만의 안쪽에 위치한다. 2019년 기준으로 인구는 5만643명으로 에스토니아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1967년에 패르누의 레이우 강(Reiu jõe) 입구에서 기원전 8세기 무렵 어부와 사냥꾼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굴됐다.
1251년 패르누의 북서쪽에서 흘러드는 사우가 강(Sauga jõgi)이 패르누 강과 합치는 곳에 사례 레네(Saare-Lääne)의 주교가 패로나(Perona)라는 도시를 건설해 교구의 중심을 삼았다. 옛 패르누다. 1263년 리투아니아인들이 교구의 중심을 합살루로 옮겼다. 1265년에는 리보니아 기사단이 엠베케(Embeck)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새 패르누(Uus-Pärnu)이다. 부동항이던 새 패르누는 한자동맹 소속의 중요한 항구 역할을 했다.
1560년부터 1617년 사이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패르누를 지배했다. 리보니아 전쟁 중에 스웨덴이 장악했지만 1660년 올리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공식적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소속이었다. 1700년 시작된 북방전쟁 과정에서 러시아는 1710년 패르누를 점령했고, 1721년 체결된 니스타드 조약에 따라 러시아제국에 속하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얻은 에스토니아에 속하게 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이던 1941~1944년까지는 독일군이 점령했다. 전쟁이 끝나고 소련군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면서 패르누 역시 1991년 독립할 때까지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하게 됐다.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패르누 옛 시가의 절반 이상이 파괴됐다.
8시 반 타르투를 출발한 버스는 2시간여를 달려 패르누 호텔 앞 루틀리 광장(Rüütli plats) 부근에 섰다. 에스토니아 공화국 선포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1918년 2월 23일 기념비 맞은편에 있는 패르누 호텔 부지에 있던 엔들라 극장(Endla teatri)의 발코니에서 ‘에스토니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언문(Manifest kõigile Eestimaa rahvastele)’을 발표함으로써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독립을 천명했다.
2005년 3월 17일 패르누 시의회는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독립선포 기념비를 건설하기로 했다. 총 상금 10만 쿠룬(krooni, EEK; 2020년 2월 22일 기준 1쿠룬은 83.68원) 규모의 공모전의 결과는 2006년 2월 23일에 최종 발표됐다. 영예의 1등은 엘마(K. Eelma), 아스(M. Aas) 그리고 무초(M. Mutso) 등 3인이 독립을 선포한 장소인 엔들라 극장의 노대를 실물 크기로 재현한 ‘노대(露臺, Rõdu)’로 결정됐다. 노대(balcony)의 벽에는 독립선언문이 에스토니아의 옛 문자화 현대문자 그리고 점자로 각각 새겨져있다.
이어서 패르누 구시가를 구경했다. 루틀리 거리를 따라가다가 붉은 벽돌의 건물이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호미쿠(Hommiku) 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아담하고 깔끔한 공원을 만난다. 코이둘라 공원(Koidula park)이다. 1925년에 조성된 이 공원은 에스토니아의 여류 시인이자 희곡작가인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에게 헌정된 공원으로, 아만두스 아담슨(Amandus Adamson)이 제작해 1929년에 제막한 코이둘라 동상이 서있다.
‘새벽’이라는 뜻의 ‘코이둘라’를 필명으로 사용한 그녀의 본명은 리디아 에밀리 플로렌틴 얀센(Lydia Emilie Florentine Jannsen)으로 에스토니아 최초의 일간지 ‘패르누의 우체부(Pärnu Postimees)’를 창간한 시인이자 작가인 요한 볼데마르 얀센(Johann Voldemar Jannsen)의 딸이다. 그녀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조국에 대한 사랑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했다.
시집으로는‘에마외기 강의 나이팅게일(Emajõe ööbik)’이 유명하고, 대표시 ‘나의 조국은 나의 사랑(Mu isamaa on minu arm)’은 제2의 국가처럼 애송된다. “나의 조국은 나의 사랑입니다. / 내가 내 마음을 준 사람. / 나는 너에게 가장 큰 행복을 노래합니다. / 내 꽃이 만발한 에스토니아! / 당신의 고통은 내 마음에 끓고 / 당신의 자부심과 기쁨은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 내 조국, 조국!”
코이둘라 공원 옆에는 블랙만 공원(Brackmanni park)이다. 패르누의 초대시장을 지낸 오스카 알렉산드르 블랙만(Oscar Alexander Blackmann)에게 헌정된 곳이다. 1878년 초대 패르누 시장에 취임한 그는 1879~1915년, 1918~1919년에 걸쳐 패르누의 시장을 역임했다.
공원에 세워진 기념비는 마티 카르민(Mati Karmin)이 제작한 것으로 1991년에 제막됐다. 블랙만 시장은 재임기간 패르누를 해양휴양지로 육성했으며,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과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연결하는 철도가 패르누를 거쳐 가도록 했다. 그는 패르누에 전기조명을 도입했는데, 이는 러시아제국에서 처음이었다.
블랙만 공원 인근에 있는 건물들은 사용되지 않은 듯 벽에는 그라피티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다음은 흰색으로 벽을 곱게 칠한 식당이 있고, 식당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루터파 교회인 패르누 엘리자베스 교회(Pärnu Eliisabeti kirik)가 있다. 지금의 교회는 1741년 러시아 제국의 차르 페테르(Петерь) 대제의 둘째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가 재무국에 명해 8000루블을 할당해 건설하도록 한 것이다.
리가의 건축가 귀터보크(JH Güterbock)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으로 1744년에 짓기 시작해 1747년에 완공됐다. 1750년에 완성된 첨탑은 리가의 성 베드로교회를 설계한 뷜베른(JH Wülbern)이 설계한 것이다. 1893년에는 리가의 건축가 하우저만(Häuserman)이 신고딕 양식으로 실내장식을 했고, 부활을 묘사한 제단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제작된 것이다. 오르간은 1929년에 제작된 것으로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회에서 북쪽으로 이동해 루틀리 거리로 들어서면 23번지 건물 앞에 서있는 동상을 만난다. 리디아 코이둘라의 아버지이자, ‘패르누의 우체부(Pärnu Postimees)’를 창간한 시인이자 작가, 요한 볼데마르 얀센이다. 얀센의 동상에서 조금 더 내려가, 루틀리 거리 21번지와 222번지 사이에 있는 작은 아치형 쪽문으로 들어서면 상인 모리의 호화로운 아파트(Kaupmees Mohri maja)가 있다. 작은 마당이 있고, 지붕 밑 창고로 물건을 올리던 도르래 시설이 되어 있다. 한자동맹 상인의 집답다.
여기에서 자유 시간을 얻어 패르누의 구시가를 구경하다가 카페에 들어 커피를 한잔 마시며 쉬었다. 정한 시간에 약속장소인 패르누 호텔 앞으로 갔는데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다. 바퀴에 문제가 생겨 정비를 하러 갔다고 한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12시 무렵 구도심을 출발해서 패르누 해변(Pärnu rand)으로 이동했다.
해변에는 거친 바람을 타고 파도가 밀려와 해변에 부서진다. 모래가 아주 곱다. 파도가 부서지는 모래사장에는 작은 돌 알갱이들이 밀려다닌다. 그런 돌 알갱이 사이에 호박이 숨어있다고 한다. 패르누 해변에서 호박을 주운 사람이 있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도를 뚫어내듯 바다 속을 들여다보지만 호박은커녕 눈만 아프다.
호박을 채집하러 다니는 전문가들은 특수 장비를 갖추고 나서는데, 특히 폭풍이 몰려온 다음에 바닷가로 나간다고 했다. 폭풍에 바다 속에 가라앉아있던 호박이 해변으로 밀려 나온다는 것이다. 발트해의 바닷물은 그리 짜지 않다고 해서 손으로 떠서 맛을 봤다. 모래사장에 부딪힌 바닷물이 그리 맑아보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12시 반에 패르누 해변을 떠나 다음 일정인 합살루(Haapsalu)로 향했다. 패르누 해변에 도착했을 때부터 야트막하게 드리우던 구름이 결국은 비를 쏟기 시작했다. 패르누와 합살루를 연결하는 도로는 그리 넓지 않은 시골길이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데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합살루는 발트 해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보름시(Vorumsi) 섬이 발트해 사이에 놓여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에스토니아 서해안의 해변 휴양지인 합살루는 1만236명(2017년 기준)이 살고 있다. 1263년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옛 패르누를 파괴한 다음 교구를 보다 안전한 지역인 합살루로 옮겼다.
지역 이름은 사시나무를 의미하는 에스토니아어 합(haab)과 작은 숲을 의미하는 살루(salu)가 결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가하면 12세기 말에 활동했던 룬드(Lund)의 대주교 압살론(Absalon)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스웨덴어와 독일어로 이 도시는 합살(Hapsal), 러시아어로는 갑살(Га́псаль)이라고 부른다.
1228년 창설된 외셀 비크(Ösel-Wiek) 교구의 주교가 지배하는 리보니아 연맹의 5개 회원국가 중 하나였다. 1560년에 마지막 주교가 덴마크의 프레데릭 2세 왕에게 양도해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다. 1791년 스웨덴과 러시아제국 사이에 체결된 우시카우푼키(Uusikaupunki) 평화조약에 의거해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 지역을 러시아가 지배하게 됐다.
합살루 해변의 진흙이 치료효과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1825년에 카를 아브라함 훈니우스(Carl Abraham Hunnius)는 최초의 진흙치료 리조트를 설립했다. 가까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족들이 소문을 듣고는 몰려오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합살루 사람들은 발트의 베니스라고 주장하지만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듯하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