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오름의 만물상 동검은이오름

제주도에서 1년…오름의 만물상 동검은이오름

기사승인 2020-04-18 00:00:00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전 날 오랫동안 바라만 보고 있었던 ‘높은오름’을 다녀오면서 고사리를 꽤 많이 꺾었다. 고사리 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지 오름 다녀온 후 피로가 쉽게 풀리지 않을 듯했다. 종아리와 허리의 근육통이 뭉긋하다. 손등엔 이리 저리 가시에 긁힌 흔적이 꽤 많다. 주말엔 어차피 집에서 쉴 요량이었으니 토요일 아침 내리는 비가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제주 시내의 상설 재래시장을 다녀왔다. 제주에서 시장 나들이는 언제든 즐겁다. 제주에는 제주시내의 민속오일장을 비롯해 함덕, 세화, 표선, 서귀포, 대정, 모슬포, 한림 등 곳곳에서 5일장이 선다. 제주에 와서 즐겨 찾는 동문재래시장은 상설시장이다. 제주여행 기념품부터 생선, 과일, 채소, 육류 등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다.

골목골목 찾아다니며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만 흥정해서 살 수 있으니 나물 한 가지를 사더라도 품질, 가격, 파는 이의 태도까지 평가하며 가게를 찾아들어갈 수 있다. 두어 시간 시장을 걸으며 두 손에 제법 묵직하게 이것저것 사서 집에 오니 일주일은 풍성하게 식탁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혈중 포타슘 치를 급히 낮추기 위해 관장약을 넣고 기다리는 중에 정말 급한 환자가 들어와 응급실의 의사와 간호사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여전히 어머니의 의식은 충분하지 않았는데, 관장약을 넣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순간적으로 침대와 응급실 바닥을 적셨다. 민망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흥건한 바닥을 몇몇 사람들이 들어와 닦아내는 동안 간호사들은 참기 어려운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의 침대를 정리했다.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희미하게 어머니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병실에 눕힐 수 있었다. 긴긴 하루가 그렇게 지났다. 그러나 그날은 시작이었다. 입원 치료를 받으며 혈액검사에서 불안정한 요소들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의식도 어느 정도 돌아와 간단하게 대화는 가능할 정도가 되어 집에서도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퇴원을 했다.

그러나 집에 와서도 어머니의 의식은 빠르게 정상화되지 않았다. 때때로 음식을 삼키지 못하니 환자용 유동식을 콧줄을 통해 넣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무의식적으로 콧줄을 잡아당겨 빼어냈다. 다시 입원을 해야 했다. 입원 후에 어머니의 의식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초여름부터 두 번의 입원치료를 받고나니 가을이 코앞에 와 있었다.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어 안정된 후에야 어머니는 다시 인천의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나마 물만두는 잘 받아 드시니 9월 중순 무렵까지 하루 세 끼 어머니의 식사는 물만두가 다였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하던 어머니가 점심 후에 거짓말처럼 웃음 지으며 한마디 하신다. 


“이제 너만 취직하면 걱정할 일 하나도 없다.”

아마도 제주도에서 오름의 아름다움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남기고 간 사진작가 김영갑일 것이다. 그는 동부 중산간 지대의 오름 사진을 많이 남겼다. 지금은 나무가 울창한 오름일지라도 그가 남긴 사진 속의 오름에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부드러운 풀만 덮여 있다. 오름의 그 유려한 곡선이 바람과 구름과 하늘과 어우러지는 지극한 아름다움의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그는 무진 애를 썼다.

이제는 제주에 사는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제주를 방문하는 많은 이들이 오름을 찾고 있다. 제주의 360여 오름 중 외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아무 제약 없이 가 볼 수 있는 곳이 제주 동부 중산간 지대의 용눈이오름, 백약이오름, 다랑쉬오름, 제주 서부의 새별오름이다.

특히 최근 찾는 이가 부쩍 늘어난 곳이 백약이오름이다. 오르기 쉽고 능선에서 보여주는 제주 풍경이 특별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백약이오름 능선에 섰을 때 특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오름이 동쪽으로 마주보이는 동검은이오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검은이오름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동검은이오름은 북쪽으로 1km 떨어져 있는 높은오름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구좌공설공원묘지 앞을 지나는 자동차도로를 따라 올 수도 있고 백약이오름 주차장 쪽에서도 농사용 자동차길을 따라 올 수 있다. 동검은이오름의 진면목을 보려면 백약이오름 쪽에서 걸어가 문석이오름의 출입구를 마주보고 있는 곳에서 탐방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동검은이오름은 기본적으로는 분화구가 남쪽으로 터진 ㄷ자 모양이지만 오름을 걷는 동안에는 좀처럼 전체 형태를 짐작하기 어렵다. 인근의 오름처럼 매끈한 화산체가 아니어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끝없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첫 걸음은 삼나무 울타리를 지나 아직은 키 작은 소나무 숲 사이의 완만한 언덕길부터 시작한다. 어린 소나무가 자라 오르는 거의 모든 오름이 이러한 오솔길을 가지고 있으니 첫 인상은 그저 평범한 오름이다.

잠시 후 언덕길이 끝나면 길은 평평해지고 저 앞으로 급하게 치닫는 길이 높게 솟아 있다. 오른쪽은 꽤 깊게 보이는 숲과 그 너머로 작은 봉우리가 보인다. 저 앞의 가파른 길이 꽤 부담스럽다. 심호흡을 하고 급경사의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면 이내 숨이 가빠오지만 잠시 멈추어 서서 돌아보면 가까이 보이는 백약이오름 그리고 그 너머 멀리 보이는 한라산과 그 산자락에 안긴 무수한 오름들이 그려내는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북쪽의 높은오름 역시 당당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급한 경사로 끝에 올라서면 능선을 따라 평평한 소나무 오솔길이 곧게 뻗어 있다. 한숨 돌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걸음을 내딛으면 이내 이 평평한 길이 사실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힐 만큼 아찔한 길임을 알게 된다. 좁은 오솔길 양쪽으로 거의 낭떠러지 수준의 경사를 보이고 있고, 그나마 길 양쪽으로 소나무들이 꽤나 잘 자라고 있어 걸음에 부담을 줄여주고 있다. 추락을 주의해야 하는 구간이니만큼 경솔하고 급하게 걸을 능선이 아니다. 제주도의 오름 어느 곳에서도 경험하지 못할 짜릿한 길이다.

그 길 끝에서 만나는 풍경은 장엄하다. 능선 끝에 서면 가까이는 손지오름, 용눈이오름의 매끈한 모습과 그 너머의 위풍당당한 다랑쉬오름이 보이고, 멀리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바다에 떠 있다. 거기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니 발아래 펼쳐지는 동검은이오름의 또 다른 능선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언덕을 내려가 넓게 펼쳐진 후덕한 능선길을 돌아서 동쪽 능선에 서면 비로소 이 오름의 대략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이 능선에서 내려가면 탐방로가 끝나는 듯 보이지만 탐방로는 중간에 오른쪽으로 돌아 분화구 안쪽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여름이라면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곶자왈과 다름없는 곳이다. 습기가 많은 길을 더듬어 걷다보면 처음 걸어 올랐던 완만한 능선에 올라서면서 동검은이오름 걷기가 끝난다. 동검은이오름은 오름의 만물상이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쿠키뉴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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