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제주시 추자면 하추자도와 황경한

제주도에서 1년…제주시 추자면 하추자도와 황경한

기사승인 2020-05-02 00:00:00

며칠 전 사람들에게 널리는 알려지지 않은 오름을 찾아가서 일면식도 없던 분을 만나 꽤 오랜 시간 서서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름만으로는 오르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아 가볍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막상 그 앞에 서니 그간 다녔던 어느 오름보다 길이 가파르다. 가파른 길이지만 쉬엄쉬엄 오르며 고사리 꺾고 꽃 찾아 살피며 오르니 어느새 저 앞에 하늘이 보인다. 마침 눈에 들어오는 토실한 고사리 꺾고 새우란을 살피다 보니 앞서 간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잰 걸음으로 올라가 보니 아내가 흰 개를 희롱하고 있다. 개가 참 순하고 사람을 잘 따른다.

숲이 발달한 오름에는 동절기 6개월 동안 산불감시원이 능선의 초소에서 근무를 한다. 이 오름에서 일하는 그는 올해 일흔 한 살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외지에 나가 생활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홀로 지내고 있단다. 다행이 외지에 마련해 둔 집에서 나오는 월세와 6개월이지만 산불감시원으로 일하는 동안 받는 급여가 있어 생활은 불편이 없다고 한다. 몇 년 전만해도 산불감시원으로 일할 사람이 없었는데 작년부터는 지원자가 많아 시험을 보았단다. 4km 달리기 체력 시험이었다고. 개 이름이 ‘이리와’란다. 제 이야기를 하는 줄 아는지 땅바닥에 누워 볕을 즐기며 졸던 녀석이 벌떡 일어난다.

꽤 긴 시간 서서 사는 이야기, 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리를 뜨려는데 그가 뜯어 두었던 제피 순을 한 움큼 건네며 집에 가서 고추장에 찍어 먹어보란다. 강한 향이 숨결에 후욱 빨려 들어왔다. 마침 배낭에 넣어온 음료와 간식거리를 나누어 드렸다. 먹을 것임을 알고는 이리와가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그의 삶이 더 많이 행복하기를.

동년배의 많은 직장인들이 구조조정과 명예퇴직 등의 칼날 앞에 언제든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을 때인데 나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아직 남아 있던 보증채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보증보험사의 담당자를 만나 상담을 해서 일정 금액을 탕감 받고 나머지는 3년 할부로 갚아 나가기로 했다. 약간의 일시금을 상환해야 했는데 뜻밖에 아버지가 깨끗한 신권 봉투를 내 놓으셨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수입이 생길 때마다 은행에서 깨끗한 돈으로 찾아 용돈으로 드렸던 돈이었다.

출근해서 일하는 동안 어머니를 온전히 아버지 홀로 보살펴야 하므로 조금이라도 그 수고를 덜기 위해 침대와 세탁기를 바꾸었다. 침대에 누워 생활하는 어머니가 앉기 위해서는 등받이를 세워야 하는데 핸들을 돌리는 수동식은 힘에 부치는 듯해 전동으로 등받이를 세울 수 있는 침대를 들였다. 아직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되기 전이어서 가격이 크게 부담스러웠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세탁기도 새로 사야 했다. 어머니 때문에 빨래가 많은 편이었는데 구형 통돌이 세탁기는 키 작은 아버지가 쓰기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드럼세탁기로 바꾸니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도 앉아서 세탁물을 넣고 뺄 수 있어 한결 편안해 졌다.

다시 출근을 시작하기 위해 한 달 동안 더 필요한 것이 없을 때까지 살피고 확인하며 거의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막상 출근일이 가까이 오자 아버지의 호흡기능에 대한 걱정은 해결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기도에 가래라도 심하게 생기면 이를 배출할 정도의 헛기침조차 매우 힘들어 할 정도로 폐기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어 시간 걸었는데 걷기가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 상추자도의 올레 길을 절반도 걷지 못했는데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멀미약 때문이었다. 나바론하늘길 걷기는 포기하고 올레코스를 따라 상추자도의 산 능선을 두루 걸은 뒤 추자대교를 건너 하추자도로 넘어갔다. 산 넘고 마을을 지나 바닷가 길을 잠시 걷고 다시 산을 넘어 예약한 숙소가 있는 신양항에 들어섰다. 신양항에는 제주와 완도를 오가는 대형 카페리가 한 번씩 들르는 곳이고 하추자도의 중심지여서 초등학교 분교와 추자중학교까지 있음에도 인적이 거의 없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침 식사 후 민박집 뒤의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마을로 들어서서 골목을 걷는데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손에 무엇인가 한 움큼 쥐고 밭에서 나온다. 인사를 하고 나니 이것저것 묻는다. 제주에서 살다가 꽤 오래 전에 추자도에 들어와 살고 있다고 한다. 장성한 자식들은 대처로 나가고 남편도 가고 혼자 살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참죽나무 순을 건네며 집에 가서 데쳐 먹으란다. 마당이 거의 없었지만 귀퉁이마다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집에 들렀다 가라고 하는데 마음이 바빠 말동무를 못하고 돌아섰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분을 뒤로 하고 걷는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신양항에서 동쪽으로 언덕을 넘어가면 모진이 해변인데, 추자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어디에 내어 놓아도 주저 없이 으뜸으로 꼽을 봄 풍경을 보았다. 꽤 넓은 경사지의 밭에 유채꽃이 활짝 피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그 유채꽃의 강렬한 노랑, 은근한 향기, 그 위를 더듬는 아침 햇빛에 취해 밭두렁을 걸어 숲에 들었다. 마치 제주의 곶자왈을 걷는 듯했는데, 상추자도의 숲속보다는 훨씬 습하고 서늘했다.

유채꽃과 서늘한 숲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황경한의 묘역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 천주교 전래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조성된 공원이다. 이 공원 아래 오른쪽에 황경한의 묘가 있다. 신유박해와 관련된 아픈 이야기를 간직한 이다.

정조가 세상을 뜨고 순조가 즉위하던 해에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는 당시 집권 보수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 이 신유박해 때 다산 정약용의 형제들과 일가친척이 멸문지화를 겨우 면하는 박해를 받았다.

4남 1녀의 형제 중 맏형이었던 정약현은 천주교도가 아니었으나, 초기에 천주교 국내 전파에 핵심역할은 했던 이벽이 그의 처남이었고, 황사영은 그의 사위였다. 둘째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거기서 사망했고, 셋째 정약종은 순교했다. 넷째였던 다산은 인생의 황금기를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로 보냈다. 유일한 여형제와 결혼한 이가 이승훈이다.

황경한은 정약현의 외손자, 즉, 정난주와 황사영의 아들이다. 신유박해 때 황사영의 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 불거지는데, 천주교 신자(信者)인 황사영이 조선에서 진행되고 있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와 그에 대한 대책을 흰 비단에 적어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은 처형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거제도, 아내 정난주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정난주가 제주도로 유배 가는 도중 배가 추자도에 들렀을 때 두 살이었던 아들 황경한을 이곳 바닷가에 내려놓았는데 마침 아들이 없던 오 씨 내외가 거두어 길렀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추자도에서는 오 씨와 황 씨는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황경한이 묻혀 있는 묘지 옆에 터를 닦고 동쪽 바다를 바라보는 넓은 터 위쪽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있고 그 오른쪽 끝에 아기를 안고 있는 한복 입은 여인상이 있다. 황경한과 그의 어머니 정난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공원에서 북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바위 위에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 져 있다. 이 공원과 바위 위의 십자가엔 늘 천주교인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는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쿠키뉴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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