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에게 밉보이면 그만인 파리 목숨…참아야지 별 수 있나요”

“주민에게 밉보이면 그만인 파리 목숨…참아야지 별 수 있나요”

기사승인 2020-05-14 05:30:00

[쿠키뉴스] 정진용 기자 = “우리는 그저 파리 목숨이지. 주민이 민원 제기하면 옷 벗고 나가야지 별수 있나. 많아 봐야 아들뻘 돼 보이는 주민이 밤에 술 취해서 경비실 문을 차고, 반말지거리에 쌍욕까지… 그저 사람 이하 취급이야”

지난 10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고(故) 최희석(59)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고 최씨는 지난달 21일 이중 주차 문제로 입주민 A씨와 갈등을 겪었다. 폭언은 물론이고 코뼈가 부러질 때까지 폭행을 당했다. 최씨는 A씨를 경찰에 고소까지 했다. 그러던 최씨는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13일 서울 소재 아파트에서 만난 경비원들은 고 최씨 사건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은평구 한 아파트에서 2년째 근무 중인 이선진(65)씨는 고 최씨 사건을 뉴스에서 보고 “오죽했으면 그랬겠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경비원한테 운전해서 차 빼달라고 요구하고 머슴, 종처럼 하대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고 털어놨다.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경력 10년차 경비원 김모(72)씨는 “예전에 일한 아파트에서 동료 한 명이 주민에 맞아 숨지는 일이 있었다”면서 “주민들이 재활용 쓰레기를 나더러 치우라고 발로 뻥뻥 찰 때 자괴감이 든다. 갑질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법적으로 강하게 처벌하기 전에는 문제 해결이 안된다”고 토로했다.

서대문구 400여 세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에서 2년째 근무 중인 이모(71)씨는 “경비원이 경비 일만 하는 게 아니다. 분리 수거장도 치우고 단지 풀도 뽑고 청소도 하고 온갖 잡일이 많다”면서 “아무리 일이 많아도 다 참을 수 있지만 갑질은 참기 힘들다. 나이 먹은 내가 여기서 잘리면 어디 가서 일하겠나”고 한숨을 쉬었다. 

경비원들이 갑질을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주민이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경비원 채용은 주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용역업체를 통해 간접 고용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매달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초단기 근로계약도 만연하다. 김씨는 “주민에게 밉보이면 용역업체에서 ‘일 그만하시죠’라는 전화가 온다. 이유도 모르고 옷 벗는 경비원들이 허다하다”고 했다. 김씨는 경비실에 오래 앉아있으면 눈치가 보인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다.   

입주민 갑질과 폭력으로 경비원이 숨지는 사고는 매해 반복됐다. 지난 2014년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 아파트에서 입주민의 횡포와 모욕을 견디다 못한 경비원 이모(53)씨가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동료의 주장에 따르면 입주민은 “5층에서 유효기간이 지난 냉동 떡이나 과자 등을 개한테 주듯이 화단으로 던져 줬다”. 지난 2018년에는 만취 주민에 폭행당한 70대 경비원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숨졌다. 지난해에는 부산 모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야구방망이로 관리소장과 관리직원들을 위협한 사건이 있었다.

위험에 노출된 경비원들의 처지는 수치에서도 나타난다. 주택관리공단에 따르면 지난 2015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임대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에 대한 입주민 폭언 폭행 건수는 2923건에 달했다. 주취폭언 폭행은 1382건으로 47.3%를 차지했고 흉기협박은 24건에 달했다.

정부는 지난 2017년 공동주택관리법을 개정해 입주자 등 관리 주체가 경비원에게 업무 외 부당한 지시를 하거나 명령을 하지 못하게 규정을 마련했으나 유명무실한 상태다. 이에 보다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한주택관리사협회는 이날 입장문을 내 “국민의 70%가 넘게 거주하는 공동주택에서 일부 입주민과 외부인의 경비원, 관리사무소 직원들에 대한 폭력으로 사회적인 비극이 증가하고 있다”면서 “갑질과 폭력 등으로부터 공동주택 관리사무소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관련 법률 재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는 경비원의 고용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사고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혜인 직장갑질 119 노무사는 “기간제법에 따르면 2년 이상 계약직으로 근무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55살 이상 고령 노동자는 예외다. 이 때문에 경비원들은 무제한으로 계속 계약직으로 남게 된다”면서 “용역업체가 바뀌면 고용 승계가 안 되는 문제도 있어 경비원들은 이중으로 고용 불안을 느낀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문제 제기 자체가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최 노무사는 “아무래도 주민 관리비로 경비원들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보니 입주민들 사이에서는 ‘내 돈으로 너 월급 준다’ ‘내 집을 지키는 경비다’는 인식이 있다”며 “실태조사에 따르면 입주민이 아무때나 갑자기 경비원을 찾아와 민원을 제기하고 집 전등을 교체해달라고 부르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경비원에 대한 시민 인식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짚었다.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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