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정진영 감독 “황당하고 이상한 얘기… 끝까지 밀고 나갔어요”

[쿠키인터뷰] 정진영 감독 “황당하고 이상한 얘기… 끝까지 밀고 나갔어요”

정진영 감독 “황당하고 이상한 얘기… 끝까지 밀고 나갔어요”

기사승인 2020-06-16 07:00:00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내가 알던 내가 사라졌다. 영화 ‘사라진 시간’을 볼 관객들은 중반부 이후부터 큰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처럼 보였던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미스터리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누군가 주인공을 속이려고 함정에 빠뜨렸다는 의심은 잦아들고, 낯설고 새로운 현실을 담담하고 무력하게 인정하는 과정은 짙은 패배감과 찝찝함을 남긴다. ‘사라진 시간’의 감독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경력 33년차 배우 정진영이라는 걸 확인하면 영화가 또 한 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중엔 고개를 끄덕일 관객도 나올 수 있다.

최근 삼청로 한 카페에서 정진영 감독은 약간의 흥분 상태로 취재진을 맞았다. tvN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촬영 중에 이틀의 시간을 마련해 진행한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이었는데도 쌩쌩했다. 그 역시 배우로 인터뷰할 때와 달리 “안 힘들다”며 “각성이 돼 있나보다”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 

정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좋은 평가에 대한 기대감도 있고, 그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이 파악될 거란 생각에 두려움도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배우로 살아오면서 영화판에 있었지만, 자신이 연출을 하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상수, 장률 감독의 영화에 참여하면서 달라졌다. 꼭 거액의 돈이 아니어도 독립영화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연히 촬영 일정이 취소돼 두 달의 시간이 비었고, 정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처음 썼던 얘긴 다 버렸어요. 전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다 쓰고 나니 관습적인 게 들어있더라고요. 제 스스로 오랫동안 그것에 익숙해져 있던 것 같아요. ‘사라진 시간’을 구상하면서부터는 법칙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가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어차피 책임도 내가 질 거고, 내 마음대로 해보자고 생각했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시놉시스도 단번에 썼고요. 시골에 부부가 있고, 그 부인에게 ‘빙의’라는 병이 있다는 식으로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내가 다음으로 인해서 충돌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도 살다보면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남들이 어떻게 나를 볼지가 점점 더 커지잖아요. 내가 진짜 행복한 일보다 남들이 봤을 때 행복할 거라고 느끼는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 충돌은 일상에 계속 있었어요.”

정진영 감독은 ‘사라진 시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최대한 고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봐도 황당하고 이상한 시나리오가 분명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고치라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아 보여주지도 않았다. 정 감독은 “이야기는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이건 황당하고 이상한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충무로 선수들에게 보여주면 이건 이상하다고 고치라고 할 것 같았죠. 그러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될 것 같아서 안 보여드렸어요. 이준익 감독도 제가 쓴 시나리오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안 보여드렸어요. 조진웅이 캐스팅 된 후에 제 사무실로 불러서 드렸어요. 참 좋은 시나리오라고, 좋다고 해주셨죠. 하지만 영화를 만들면 호불호가 갈리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건 감당해야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저 역시 ‘사라진 시간’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질 거란 생각은 안 해요. 제가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면, 비판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다만 관객들이 이야기를 캐치하든 안 하든 이야기의 재미는 따라가게 하고 싶었어요.”

부산 말투를 쓰는 형사 형구(조진웅)의 존재감이 상당한 영화다. 영화가 시작한 지 30분이 흐른 후 등장하는 형구는 관객들이 기댈 유일한 안내자다. 배우 조진웅 특유의 무심하면서도 순수하고 진정성 어린 연기가 몰입을 돕는다. 정진영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조진웅을 염두에 뒀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진짜로 그가 출연할 거란 기대는 크지 않았다.

“전 조진웅 배우가 출연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봤어요. 가능성이 5%나 될까 하고 생각했죠. 시나리오를 줄까말까 하다가 안 주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빨리 주고 거절당하자는 식으로 진웅이한테 전화를 했죠. 저예산 영화를 하니까 빨리 답을 달라고 했더니 그 다음날 연락이 왔어요. 하겠다고 그러는데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일단 만나서 고맙다고 하고 몇 가지 확인을 했어요. 먼저 선배가 하라고 해서 한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이런 관계가 한두 개겠냐고 하면서 이 책이 좋아서 하는 거지 아니라고 했어요. 시나리고를 좀 고칠까 했더니 ‘다른 덴 고쳐도 나 나오는 데는 하나도 고치지 마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주인공이 이 영화를 믿어준다는 게 너무 고맙더라고요. 그랬더니 진웅이가 ‘어느 회사에서 만들어요’라고 물어서 내가 만든다고 했어요. 영화사 등록만 했지 엘리베이터도 없는 50년 된 아파트에 아무것도 없이 시나리오 하나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진웅이가 지금 제작사 대표를 끌어들였어요. 고맙죠. 제가 혼자 했으면 이렇게 안 됐을 거예요. 개봉도 이렇게 크게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정진영 감독은 홍보팀과 함께 ‘사라진 시간’의 장르를 이야기했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홍보하는 입장에선 미스터리로 가야 하는데 그의 생각은 달랐다. 미스터리 장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오히려 슬픈 코미디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가장 원하는 건 관객들이 아무 정보 없이 극장에 와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전 관객들이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시면 좋겠어요. 지금은 ‘사라진 시간’을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오해가 생길 수 있어요. 미스터리는 관객들이 답을 다 맞혀야 하잖아요. 하지만 장르가 없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해서 이해하기 쉬운 미스터리로 갈 수밖에 없었죠. 결국 어떻게 홍보하든 관객은 못 속여요. 개봉 첫날 정체가 다 드러나잖아요. 관객들이 좋아하면 영화가 잘 되는 거고,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관객 마음에 안 들면 평가가 나쁠 거라고 생각해요. ‘사라진 시간’도 관객을 만나서 정체가 드러날 영화가 아닌가 생각해요. 전 관객들이 ‘사라진 시간’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bluebell@kukinews.com /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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