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에 ‘밤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쿠키뉴스] 인세현 기자=‘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감독 제이 로치, 이하 ‘밤쉘’)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2016년 폭스뉴스의 여성 앵커 그레천 칼슨이 로저 에일스 회장을 성희롱 혐의로 고소한 사건을 소재로 한다. 이를 극화한 영화는 직장 내에서 권력에 의한 성범죄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가해자가 속한 거대 권력이 어떤 식으로 피해자의 입을 막고 사건을 은폐하려 하는지도 비춘다. 하지만 영화 속 세 여자는 끝내 목소리를 낸다. 여기 더 많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더해져 세상을 바꾼다. 지금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 봐야 하는 이유다.▲ “그런 행동을 멈추는 거요.”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를 고소한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에게 변호사는 “소송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권력자를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한 피해자들에게 흔히 따라붙는 눈초리와 닮았다.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공론화한 이후 끊임없이 다른 속셈을 의심받는다. 로저의 성적 요구를 거부해 좌천당한 그레천 또한 계약이 갱신되지 않고 끝난 직후 고소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보복성 소송’이라는 여론에 직면한다. 하지만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레천은 단호히 답한다. “그런 행동을 멈추는 거요. 누군가는 말해야 해요. 분노해야 하고.” 미국 보수언론의 절대 권력자를 성희롱으로 고소하며 피해자가 바란 것은 이 한 가지였다.
▲ “누가 네 옷을 벗겼는데 그걸 증명하라며 나체로 걸으란 소리잖아.”
그레천이 또 다른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장담한 것과는 달리, 추가 폭로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스뉴스 직원들은 로저를 두둔하고 나선다. 여성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함부로 나섰다가는 직장에서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물론, 경력 자체가 끝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과거 로저에게 성희롱당한 경험이 있는 폭스뉴스의 유명 앵커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도 고민에 빠진다. 백인이며 보수 미디어의 간판스타인 메긴은 기득권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권력형 성범죄에 관해선 쉽게 입을 열 수 없다.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되려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회사 내 익명의 핫라인이 있다는 동료의 말을 들은 메긴은 분노에 차 소리친다. “월급 주는 사람을 변태라고 불러봐. 그 사람이 관리하는 익명 핫라인에 신고해.”
▲ “직장 내 성희롱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질문의 늪에 몰아넣어요.”
폭스뉴스의 새로운 스타가 되고 싶은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은 우연히 로저와 대화할 기회를 얻지만, 그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로저는 케일라에게 노골적인 말 대신 “충성심을 보이라”라며 “그 방법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압박한다. 그 상황을 마치 피해자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가해자의 화법이다. 케일라는 로저에게 성폭력을 당한 후 자신에게 끊임 없이 묻는다. “내가 뭘 입었지?” “내가 약자로 보이나?” “여기 남는다면 참고 견뎌야 할까?” 케일라의 말처럼 직장 내 성희롱은 가해자에게 잘못을 묻는 대신, 피해자가 자신을 검열하게 한다. 그레천의 고발 이후 메긴 또한 피해자임을 알게 된 케일라는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새롭게 묻는다. “다음 직장은 다를까? 아니면 내가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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