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이제야 고발했느냐고 추궁당한다
2016년 7월6일. 폭스뉴스의 앵커 그레천 칼슨은 방송국 회장인 로저 에일스를 성희롱 혐의로 고소했다. 그가 폭스뉴스에서 해고된 지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밤쉘’은 칼슨의 고소에 대한 반응을 다음과 같은 대사로 전한다. “퇴사하고 소송을 걸었어야지. 잘리니까 소송한 거잖아요. (성폭력 직후엔) 왜 불평 안 한 거야?” 김지은씨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을 때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전직 비서가 박 전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뒤에도 ‘왜 즉시 신고하지 않고 이제야 고소하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이 같은 의문 제기는 피해자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비난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2차 가해다. 그리고 ‘밤쉘’의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는 앞선 질문에 이렇게 응수했다. “여성들을 떠미는 거지. ‘자, 뭐든 당당히 말해. 근데 방송국은 로저 편이야. (중략) 근데 방송 경력은 쌓아야 하잖아? 월급 주는 사람을 변태라고 말해봐.’” 공공기관 비서로 일했던 A씨 역시 안희정 사건 재판부에 보낸 탄원서에서 “말할 수 없음. 문제 제기할 수 없음. 그것이 바로 위력”이라고 꼬집었다.
2. 음해의 대상이 된다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은 그의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한 오래된 수법이다. 칼슨이 에일스를 고소한 이후 폭스뉴스 내부에선 “그레천 칼슨은 직장에 친구 하나 없어” “크게 한몫 뜯어내려고 작정한 거죠” 같은 비방이 들끓었다. 홍보부 직원은 칼슨이 에일스에게 보낸 메시지에 웃는 얼굴을 그렸다며 “누가 성희롱범한테 스마일을 보내요?”라고 따져 묻고, 에일스는 칼슨의 배후엔 자신과 사이가 나쁜 폭스뉴스 회장 일가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편 김지은씨는 과거 안 전 지사에게 보낸 메시지에 ‘^^’, ‘ㅠㅠ’, ‘ㅎ’, ‘넹?’ 같은 표현을 썼다며 법정에서 공격받았다. 수행비서로서 성실히 일했던 그의 삶은 재판에서 안 전 지사 측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됐다. 박 전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 또한 온갖 음모론에 시달리고 있다. 피해자의 법률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의 과거 이력을 빌미로, 이번 고소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지난 22일 열린 피해자 측 2차 기자회견에서 “변호인은 피해자를 대리한다. 변호인에 대한 공격은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라며 “변호인에게 피고소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매우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3. 생계를 위협받는다
2006년, 폭스뉴스의 앵커이자 워싱턴 지국장이 된 브라이언 윌슨은 회사의 리포터인 루디 바크티아에게 전일제 업무를 제안하며 성 접대를 요구한다. 처음엔 윌슨의 말뜻을 못 알아듣는 척하며 말을 돌리던 바크티아는 이내 자책하고 심지어 사과까지 해가며 완곡하게 요구를 거절하지만 결국 일자리를 잃는다. 에일스 역시 칼슨이 자신을 고소한 일로 커리어를 잃게 될 것이라며 자신만만해한다. 실제로 권력형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피해 신고가 더욱 어렵다. 김지은씨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안 전 지사의 성폭력을 밝힌 바로 다음 날 면직됐다. 그는 2018년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에 기고한 글에서 “제가 다시 노동자가 되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언젠가 꼭 다시 불리고 싶습니다.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4. 살아있는 권력과 싸워야 한다
‘밤쉘’에서 칼슨이 고소한 상대는 에일스였지만, 그가 싸워야 했던 건 에일스 개인뿐만이 아니었다. 에일스의 권력 아래 있던 폭스뉴스 전체가 칼슨을 공격했다. 빌 오라일리 등 권력형 성범죄의 또 다른 가해자들은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구축했고, 회사의 감시를 받는 여성 직원들은 불이익을 걱정해 에일스를 비호했다. 김지은씨가 ‘김지은입니다’에 쓴 것처럼, “미투는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힘과 싸움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책에 따르면 김지은씨는 미투 이후 ‘조배죽’(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의 대상이 됐다. 조직적인 음해와 위증, 2차 가해가 이어졌다. 대법원의 유죄 판결이 있고 난 뒤에도 안 전 지사의 모친상에는 유력 정치인들의 공개적인 조문이 줄을 이었다. 한편 박 전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는 4년간 20여명의 서울시 관계자에게 피해를 호소했지만 모두 묵살 당했다고 한다. 서울시장의 엄청난 위력이 작용한 결과였다. 박 전 시장의 장례가 서울시장장으로 치러지고 정·관계 유력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돌아보며 애도하는 동안, 피해자는 신상털이, 음모론, 악의적인 비방에 시달렸다. 칼을 쥔 자만 달라졌을 뿐, 위력은 여전히 “저는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호소하는 피해자를 짓누른다. 하지만 이 싸움은 피해자 혼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안 전 지사의 모친상으로 촉발된 여성들의 ‘연대 구매’ 행렬 덕분에 ‘김지은입니다’는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박 전 시장의 장례를 서울시장장으로 치르는 데 반대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이틀 만에 5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밤쉘’도 누적관객수 15만을 넘기며 순항 중이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처럼 “이것이 시작”이길, 피해자들이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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