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물리학 석사 학위가 있어야 할 것”이란 배우 로버트 패틴슨의 말은 맞았다. 영화 ‘테넷’(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흥미로운 물리학적 상상력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사물의 엔트로피를 반전시켜 시간을 거스르게 한다는 ‘인버전’의 개념이 영화 안에서 확대되고 뒤집어지며 여러 번 꼬인다. 새롭게 획득한 낯선 시공간에서 ‘테넷’은 복잡하게 놓여있는 진실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세계를 카메라로 구현해낸 놀란 감독의 ‘테넷’은 그 어느 작품보다 더 영화적이다.
한 오페라 극장 테러 사건을 막기 위해 투입된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움직이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기계 부품처럼 생긴 묘한 물체도 마주하게 된다. 테스트를 거쳐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된 그는 ‘테넷’이란 단어, 사물의 엔트로피를 반전시켜 시간을 거스르는 기술의 ‘인버전’의 존재를 배운다. 그리고 닐(로버트 패틴슨)과 함께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사토르(케네스 브래너)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테넷’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구하는 스파이 영화의 문법을 따른다. 이름도 없이 작전의 주도자로 불리는 주인공은 관객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며 묵묵히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작전으로 뛰어든다. 그동안 몰랐던 세상을 배우며 접근해가는 과정이 전반부에 펼쳐진다면, 후반부엔 그가 주도적으로 작전을 이끌고 자신이 이해한대로 선택해나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세상을 구해야 할 뚜렷한 동기도, 과정에서 느끼는 정체성 고민도, 동료와의 우정이나 위험한 로맨스로 대부분 생략됐다. 그 자리를 대신해 마치 2시간30분 동안의 물리학 전공 수업처럼 빠르게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되는 인버전의 다양한 응용 상황이 펼쳐진다.
인버전 개념은 사실상 ‘테넷’의 주인공이다. 인물과 사건, 플롯과 메시지처럼 기존 영화에서 눈여겨보던 요소들은 ‘테넷’에서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 ‘미래 기술’이라는 무책임한 설명으로 현실성 여부를 건너뛰고 인버전을 집어넣는다. 문제 상황과 해결 방법, 빌런과 싸우는 방식 등 ‘테넷’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인버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가상의 물리학 개념이 현실에 존재할 때 어떤 상황이 가능한지 하나씩 보여주며 끝없이 발전시켜가는 실험 과정이 ‘테넷’의 진짜 플롯에 가깝다. 작은 것에서 시작한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과감한 전개와 그것을 CG를 최소화해서 구현해낸 영상의 존재감이 영화 전체를 지탱한다.
‘테넷’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상법을 제안한다. 감독은 이해하기 어려운 학생을 배려하지 않고 혼자 신나서 설명하는 교수처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간다. 익숙한 스파이 장르 문법을 차용해 이 장면이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걸 전제하고 가는 방식은 묘한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영화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완벽하게 통제하고 평가해왔던 관객의 위치를 조정하는 하나의 장치로 볼 여지가 있다. 다시 감상해서 이해해보려는 관객과 혹평과 실망을 쏟아내는 관객, 새로운 영화를 즐기는 관객 등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다.
26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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