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타계한지 9일로 1년이 됐다. 한때 대우그룹을 재계 서열 2위 반열에 올리며 셀러리맨 신화를 써낸 그는 돈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지난 1989년 써낸 에세이에 잘 나타나 있다.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개인적 죽임이라면,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사회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다."('세상을 넓고 할일은 많다'-중에서)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우중은 경기고등학교,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스물다섯 세인 1960년 친척이 운영하는 한성실업에 들어가 7년간 무역업무 일을 했다. 7년간의 월급쟁이 생활을 끝내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김우중은 직물회사 대도직물 사장 도재환 씨의 동업 제의로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라는 이름은 대도직물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들었다. 서울 명동 동남도서빌딩 4층에 마련한 20여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직원 5명과 시작한 대우실업은 첫 단추부터 승승장구했다. 창립 첫해에만 58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김우중은 '일 중독자'로 유명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 통금시간에 걸려 직원들과 여관방에서 잠을 자던 시기가 행복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일' 사랑도 그의 저서에서 볼 수 있다. 대우가 짧은 기간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헌신적인 대우 근로자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남들처럼 '아침 아홉시에서 저녁 다섯시까지가 아니라, 새벽 다섯시부터 밤 아홉시까지 일 해왔다. 우리처럼 시간을 잘 활용해 열심히 일한다면 이와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중에서)
김우중 행보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기업인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 기업인 최초로 받았고, 최초의 대북협력사업인 '민족산업총회사'를 북한 남포에 설립했다. 국내 최대의 지상 23층 규모의 사옥 건립, 한국 기업 최초 호주 시드니 해외 지사 설립 등이다.
1982년 김우중은 대우실업을 (주)대우로 바꾸고 그룹으로 외형을 갖춰나갔다. 90년대 들어서는 '세계경영 우리기술' 슬로건으로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는 등 동구권 시장을 향해 뻗어나갔다.
김우중은 1990년 세계경영을 기치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당시 대우의 수출 규모는 한국 총 수출액의 약 10%의 달한 것으로 알려진다.(1998년 한국 총 수출액 1323억달러 중 대우 수출액 186억달러로 약 14% 규모)
1997년에는 쌍용차 인수, 이듬해 1998년에는 계열사 41개, 해외법인 396개를 거느리며 당시 삼성과 LG를 제치고 재계서열 2위로 치고 올라갔다. 당시 대우의 임직원수는 30만면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영역 확장 탓이었을까. 1998년 외환위기로 김우중의 '대우'는 30세의 짦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여러 '설'이 나온다. 무리한 투자와 과다한 부채로 인한 경영몰락과 경제관료에 의한 기획해체설이 나온다. 사실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김우중은 국내 산업사의 굵은 획을 그었다는 점은 의심에 여지가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꿈이요 희망인 젊은이들에게 내가 살면서 직접 겪고 깨달은 바를 들려주기를 바라왔다. 젊은이여,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그 길을 가고 그 일을 해내는 용기 있는 개척자들에 의해 역사는 조금씩 전진해 온 것 아닌가. 젊은이여, 우주를 생각하고 큰 뜻을 품어보라."
김우중은 2010년 부터 마지막 봉사라 여기면서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에 1000여 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하는 등 젊은이들을 해외사업가로 키우고자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양성사업에 노력하다 지난해 12월 9일 영면했다.
한편 (사)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9일 김우중 타계 1주기를 맞아 사이버 추모공간을 만들어 고인을 추모했다.
eunsik80@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