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지니 섬마을은 '시네마천국' 됐다

노을이 지니 섬마을은 '시네마천국' 됐다

2박3일 섬마을영화제 열린 통영 우도
주민과 관람객 어우러진 첫 영화잔치

기사승인 2021-06-28 15:13:04

제1회 섬마을영화제가 열린 통영 우도

[쿠키뉴스] 김지방 기자 =가수는 노래를 부르며 자꾸 서쪽 바다를 보았다. 분홍빛 노을이 짙어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자작곡을 연거푸 부른 통영의 아마추어 4인조 ‘듣는건너의책임’이 앵콜까지 받은 뒤에 마침내 말했다.

“이제 영화제를 시작해도 되겠죠?”

노을이 질 때를 기다리는 축제, 제1회 섬마을영화제가 경남 통영 우도에서 25일 저녁 개막했다. 장소는 옛 선착장에 마련한 특별 상영관. 갯내음 물씬하고 갈매기가 날고 스크린마저 바람에 출렁이는 곳이었다. 밝은 낮엔 스크린에 비친 그림이 보이지 않아 해가 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영화제를 찾아온 관람객 30여명은 이날 통영에서 아일랜드호를 1시간 동안 타고 들어왔다. 우도 주민 30명, 영화제를 준비한 통영섬지니협의체와 초청 받아 온 영화감독 등 30명, 모두 100명도 안 되는 인원이 2박3일의 일정을 시작했다.

 
섬마을영화제에 출연한 우도 주민들이 25일 개막식에서 지금은 문을 닫은 우도초등학교 졸업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섬마을의 민낯, 섬사람의 속마음


개막작 ‘우도마을 다이어리’는 이 영화제를 위해 특별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장님, 어촌계장님, 식당주인 아주머니, 카페 사장님과 할머니도 관람객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우도의 토박이 주민과 외지에서 시집 오거나 이사를 온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살짝 드러냈다.

“20년 살아온 나도 삐딱하면(여차하면) 갯것이라는데 나도 이제 우도 사람이야.”

“우도로 시집 오니 언제 나가나 지켜들 보더라고요. 우도가 내 집입니다. 나는 평생 여기 살낍니더.”

웃음과 탄식이 엇갈리다 짧은 상영시간이 지나갔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철썩철썩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스크린에서 나오는지 오른편 선착장에서 들려오는지 구분이 안 갔다. 컹컹 동네 강아지 짖는 소리도 마찬가지.

몇몇 주민들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이어 초청작인 ‘나는 보리’(김진유 감독)가 상영되는 동안 동네 식당에 주민들이 모였다. 영화제 준비위도 식당에 불려갔다. 영화가 너무 솔직했던 탓인지, 새색시 뭍처녀에게 물때를 알려주고 따개비 따는 법 가르쳐준 할머니들 이야기까지 다 담지 못한 탓인지, 섬마을 어른들은 꾸지람을 했다. 작은 섬에서 행사를 준비하며 쌓였던 크고 작은 불만도 같이 터져나왔다. 식당 바깥까지 고성이 들려왔다. “내일 영화제를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영화제 준비위원장 이동열씨는 난감했다. 이 위원장은 통영 500여개 섬을 연결해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해왔다. 그가 몸담은 통영섬지니협의체와 기업의 사회적책임을 지역에서 찾고 있는 삼인행여행사는 이번 영화제를 준비한 주최측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수고가 주민들에게 오히려 피해만 주는 건 아닐까. 앞으로 섬사람들과 계속 같이 활동할 수 있을까?

이튿날 아침, 반전이 일어났다.

우도에서 가장 오래된 밥집인 송도호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주인인 김강춘씨와 주방장이자 살림꾼인 강남연씨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아저씨 아주머니, 어제 영화에서 봤어요.”

“우도 사람들 너무 멋지고 따뜻하세요.”

조금 민망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관람객들은 순수하게 받아 들여주었다. 우도어촌계장인 김씨는 걱정이 풀렸다. “이제 마을 사람 모두가 영화배우”라는 소리에는 새콤한 뽈락젓갈처럼 기분이 짜릿하기까지 했다. 이장 김정갑씨는 “내가 이렇게 미남인줄 영화를 보고 알았다”며 농도 했다. 주민과 관람객이 함께 어우러진 섬마을영화제의 힘이었다.

영화제에 참석한 고재열 여행감독은 “섬의 주인, 섬콘텐츠의 기획자, 섬의 손님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무대였다”면서 “관이 주도했다면 열배의 돈을 들여도 하지 못했을 기적 같은 행사”라고 말했다.

섬마을영화제에 참석한 관람객들이 26일 우도와 이어진 연화도 일대를 걷고 있다.


영화가 섬을 찾아오니 생긴 일

영화제 이튿날이자 폐막일인 26일, 관람객들은 섬여행자가 되어 바닷가와 언덕, 숲속과 마을 구석구석을 누볐다. 서로 얼굴이 익숙해져 우도마을 외길을 오갈 때마다 인사를 주고 받았다. 몽돌해변에서 스킨스쿠버를 하며 멍게를 따기도 하고, 다리를 건너 이웃섬 연화도 출렁다리까지 트레킹도 하고, 바위에 자리를 잡아 낚시도 했다. 구멍섬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아라돔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신 뒤 다시 스크린 앞에 모였다.

주말을 맞아 찾아온 관광객들까지 어우러져 섬이 더 북적였다. 외국의 큰 영화제에 온 듯 살짝 들뜬 기분까지 들었다. 노을이 지고 영화가 다시 시작됐다. 영화제를 모르고 찾아온 관광객들도 캠핑의자를 끌고 와 곳곳에 앉았다.

조종덕 감독의 ‘우리집 멍멍이 진진과 아키다’는 80년대 통영을 배경으로 한 만화영화였다. ‘여름의 사랑’(김서현 감독) ‘달팽이’(김태양) ‘우주의 끝’(한병아) ‘무협은 이제 관뒀어’(장형윤)까지 상영이 끝나고 밤늦도록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등대만 부지런히 밝히던 우도 앞바다에 대형 스크린의 불빛이 하늘하늘 비춰졌다.

섬마을영화제는 관람객이나 주최측만 아니라 우도 주민들도 함께 했다.

섬마을영화제에 출품된 단편영화 감독과 배우들이 관람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폐막 잔치에는 뭍에서 공수해온 돼지 수육에다 우도에서 잡은 문어 숙회도 나왔다. 새벽이 올 때까지 영화 이야기, 섬 이야기로 오랜만에 섬이 소란스러웠다. 섬의 막걸 리가 동이 났다. 한 관람객은 “영화 관객과 주민과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2박3일 동안 섬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지내면서 영화도 같이 보고 바닷가도 같이 가고 밥도 같이 먹는 게 참 신기했다”면서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 때문에 관람객이 제한됐지만 그게 오히려 영화제의 매력을 더했다. 바다와 통영을 주제로 한 영화들은 현실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섬과 잘 어우러졌다. 영화가 섬을 찾아오니, 섬이 영화가 되었다.

다양한 영화제에 참여해온 한병아 감독은 “섬에서 열리는 영화제라는 컨셉도 참 독특하지만, 제1회라 그런지 준비하는 분들도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시고 주민들도 자연스럽게 동참하시는 모습이 참 풋풋하고 보기 좋다”고 말했다. 이동열 준비위원장은 “섬 주민들의 문화향유권과 자존심을 찾아주고 싶었다”며 “첫회라 미흡한 점이 많았는데 더 잘 준비해 2회 3회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섬마을영화제가 열린 특별상영관 주변에도 주민과 관광객들이 모여 영화를 함께 보고 있다.

관람객들이 떠나는 27일, 몇몇 주민들은 선착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우리도 너무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오세요.” 배가 움직이고 손 흔드는 사람들이 멀어졌다. 등대가 보이는 바닷가 극장, 구멍섬 너머로 지는 노을, 다리 아래로 지나는 여객선, 파돗소리와 온갖 새 소리, 갈칫국과 톳무침,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스크린을 보던 주민들의 얼굴... 우도에서 열린 영화 축제가 한편의 영화처럼 가슴에 남았다.

fattykim@kukinews.com

우도 몽돌해변 앞바다 구멍섬으로 해가 지고 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ukinews.com
김지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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