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이 도와줄게, 너의 생리 파티’ [0.687]

‘언니들이 도와줄게, 너의 생리 파티’ [0.687]

기사승인 2021-12-24 06:00:25

[0.687]
글로벌 성 평등 지수 0.687. 156개국 중 102위. 2021년 한국은 완전한 평등에서 이만큼 멀어져 있다. 기울고 막힌 이곳에서도 여성은 쓴다. 자신만의 서사를.

연극 ‘지장이 있다’ 공연장 로비에 쌓인 생리대들. 배우 정인지는 이 사진을 올리며 “멋진 사람들이 많다”고 적었다. 정인지 SNS 캡처.

중학교 2학년 때 초경을 했다. 또래보다 늦은 편이었다. 기뻐하기는커녕 누구에게 말하기조차 멋쩍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같은 반 친구가 장미꽃을 선물해줬다. 초경은 축하받을 일이라며 부모님께 꼭 알리라고도 했다. 이상했다. 월경이 그토록 신성한 것이라면서, 왜 월경대(생리대)는 남들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지 못하고, 왜 ‘마법’이니 ‘그날’, ‘대자연’ 같은 단어로 에둘러 말해야 했을까. ‘생물학적 원리에 의한 현상’이라 ‘생리’라고 부르면서, 왜 생리 중인 티를 내지 않으려 안달했을까.

지난 16일 찾아간 서울 대학로 미마지 아트센터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생리대를 보며 해방감을 맛봤던 건 이런 경험 때문이었다. 비닐봉지나 종이가방에 가려지지 않은 채 존재감을 뽐내는 생리대들이 어찌나 위풍당당해 보이던지. 공연장에서 ‘생리대 파티’를 벌인 장본인은 배우 정인지다. 그는 연극 ‘지장이 있다’에서 호흡을 맞춘 동료들과 함께 생리대 기부 프로젝트를 벌였다. 배우·제작진이 직접 제작한 생리대 파우치에 관객들이 기부한 생리대를 담아 필요한 청소년에게 나누는 프로젝트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엔 “SNS가 아이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장악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넷플릭스.

여성 청소년 옥죄는 ‘자기혐오’, 그는 말하고 싶었다


정인지는 어쩌다 ‘생리대 요정’이 됐을까. 최근 공연장 근처 회의실에서 만난 그가 들려준 얘기는 이랬다. ‘지장이 있다’ 제작진과 출연진은 지난 5월, 13~15세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워크숍을 열었다. 성인과 청소년이 1대 1로 짝을 지어 신촌 일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때 묘한 인상을 받았다. “아이들이 마스크 벗는 걸 극도로 싫어했어요. 왜인지 물어보니 자기가 못생겨서, 못난 얼굴을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서래요.” 함께 있던 배우 김수정도 거들었다. “실생활에서는 자신을 숨기려 하는데,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선 ‘멋진 나’를 보여주고 싶어 하더라고요. 마음 아팠어요. 이 아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스스로를 증명하며 살아야 하는지….”

조나단 헤이트 뉴욕대 사회심리학 교수가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10대 여성의 자해로 인한 병원 입원율과 자살률이 폭증한 시기와 SNS가 사회 전반에 퍼진 시기가 일치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SNS에 달린 댓글과 ‘좋아요’ 수에 감정이 좌지우지되는 10대 소녀를 보여준다. 불특정 다수에게 5분에 한 번씩 삶을 평가당하는 SNS 환경에서, ‘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쉽게 힘을 잃는다. ‘라떼는’을 떠올리며 마냥 안타까워 할 수만은 없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나온 대사처럼, ‘옛날이 좋았다’는 말은 “옛날을 안 살아본 사람들한텐 너무 무책임한 이야기”라서다.

자기혐오에 질식당하는 여성 청소년들에게 정인지는 ‘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부 물품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러다 생리대를 떠올리게 됐죠. 생리를 시작한 아이들은 혹여 자신한테서 냄새가 날까, 혹은 남에게 생리대가 보일까 걱정하며 쉽게 움츠러들곤 하거든요.” 5년 전 보도된 ‘깔창 생리대’ 사연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이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을 대신 이용한다는 이야기였다. 여성가족부가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에게 월 1만1500원의 생리대 구매 비용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높은 생리대 가격에 비하면 부족한 금액이라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생리대 파우치를 어깨에 멘 배우 이예지. 그는 생리대 기부 프로젝트 홍보를 도맡았다. ‘지장이 있다’ SNS 캡처.

‘피 흘리는 언니들’이 이어가는 연대기

정인지가 낸 아이디어는 ‘피 흘리는 언니들’을 만나 현실이 됐다. ‘지장이 있다’에 함께 출연한 배우 이하영·박수진·김수정·이예지와 허선혜 작가·한아름 연출가 등 제작진이 모두 힘을 보탰다. 생리대 파우치에 동봉된 생리대 사용 가이드는 여성 배우들과 제작진의 ‘집단 지성’으로 완성됐다. 생리대 종류부터 교체 주기, 속옷 세탁 방법까지 세세하게 안내했다. 편부 가정에서 자랐다는 김수정은 “초경 때 생리대 붙이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헤맸던 기억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떠올랐다”고 했다.

‘지장이 있다’ 팀의 생리대 기부 프로젝트는 여성들이 쓰는 ‘피의 연대기’를 이어간다. 이들은 월경을 ‘출생 가능한 신체가 됐다는 신호’로 떠받들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가 월경으로 인해 고립감을 느끼지 않도록 손을 뻗을 뿐이다. 한아름 연출가는 “‘처음’이 주는 불안감은 엄청나다. 또한 그 크기가 상대적이라 섣불리 도움을 주기도 어렵다. 초경은 내가 겪은 ‘처음’ 중 유일하게 알려줄 수 있는 경험이다. 그 점이 나를 이 프로젝트로 이끌었다”고 돌아봤다. 연대는 공연 밖으로도 이어졌다. 우란문화재단 소속 서미정 PD와 허지원PM이 생리대 사용 가이드 제작을 지원했고, 배우 강지혜·김아영·곽나윤 등은 한달음에 공연장으로 달려와 생리대 파우치 판매를 도왔다. 수익금은 파우치 제작비를 제한 뒤 모두 기부된다.

조민영 조연출가는 “살면서 ‘생리’라는 단어를 이렇게 많이 발화해본 경험은 처음”이라며 웃었다.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지 못하고 생리대를 숨겨 지니는 사이, 월경으로 인한 혹은 월경과 관련한 공동체의 문제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피 흘리는 언니들’은 이런 금기에 균열을 낸다. “네 앞에 빨간 피, 무서워하지 마♬ 네 앞에 빨간 피, 겁내 말아봐♪” 이지향 음악감독이 작곡하고 한아름 연출가가 작사한 ‘생파송’에서 배우들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다. 정인지는 말했다. “아이들이 생리대를 받고 민망해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하지만 월경이 너를 못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라는 이야기가 (생리대를 통해) 손결로 전해지길 바라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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