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혀지지 않는 ‘설강화’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

좁혀지지 않는 ‘설강화’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

기사승인 2021-12-29 06:00:15
JTBC 드라마 ‘설강화 : 스노 드롭’ 속 임수호(정해인·왼쪽), 은영로(지수). JTBC

역사왜곡인가, 극적 상상인가. JTBC 드라마 ‘설강화 : 스노 드롭’(이하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이 열흘째 뜨겁다. 극중 대학생으로 위장한 북한 간첩 임수호(정해인)를 호수여대 재학생 은영로(지수)가 운동권 학생으로 오인했다는 1, 2회 내용이 도마 위에 올랐다. 여론은 ‘민주화 운동을 폄훼한 설정’이라며 들끓었다. 제작진은 “초반 전개에서 오해가 비롯된 것”이라며 3~5회를 특별 편성했지만 잡음은 여전하다. 방송을 폐지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35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급기야 JTBC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반면 “링컨이 낮에는 대통령이고 밤에는 뱀파이어 헌터였다는 상상도 가능한 게 창작의 영역”(영화 제작사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이며,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의 초석”(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이라는 반박도 거세다. 쿠키뉴스는 드라마 내용과 전문가들 의견을 바탕으로 ‘설강화’ 논란의 쟁점을 다시 짚어봤다.


“‘설강화’가 민주화 운동을 폄훼한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설강화’는 지난 3월 일부 시놉시스가 유출됐을 때부터 민주화 운동 폄훼 논란에 휩싸였다. 여주인공 이름이 민주화 운동가 천영초와 같고, 간첩인 남주인공이 운동권 학생으로 오해받는 대목이 문제였다. ‘설강화’의 극 중 배경인 1987년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10 민주항쟁, 이한열 열사 사망 사건 등이 일어나며 민주화 열망이 타오르던 때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운동권을 간첩이라는 명분으로 잡아들여 고문과 핍박을 일삼았다. 때문에 운동권과 간첩을 연결 짓는 설정이 과거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고 극우 진영이 내세우는 ‘민주화 운동 간첩 배후설’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영로는 수호를 운동권 학생으로 오인해 기숙사에 숨겨준다. JTBC

‘설강화’ 본편에선 어떻게 그려졌을까. 일전에 공개된 시놉시스와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그 분량이 길진 않다. 여주인공은 미팅에서 만난 남주인공이 경찰에게 쫓기자 기지를 발휘해 그를 돕는다. 남주인공이 도망치는 주변에선 운동권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그곳에선 대표적인 운동권 가요 ‘솔아! 푸르른 솔아’가 흘러나온다. 이후 피투성이가 된 남주인공이 기숙사로 도망치자 여주인공은 적극적으로 숨겨준다. 운동권이던 친오빠가 떠올랐고, 그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남주인공은 기존 설정대로 남한에 파견된 공작원, 간첩이다. 남주인공은 여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자신을 경찰에 쫓기는 운동권 학생이라 생각해도 이를 정정하지 않는다. 학생들 도움으로 안기부를 따돌린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이 사는 기숙사를 점거해 인질극을 벌인다.

일각에서는 ‘설강화’에서 간첩이 운동권 학생으로 오해받는 부분을 문제로 본다.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는 “1987년 민주화 운동 배후에 북한 간첩이 있었고 정부 요원들의 고문은 불가피했다는 생각을 담은 창작물이 흥행에 성공하면,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1980년 광주에서 무장 공격을 주도했다는 생각을 담은 창작물이나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 취업자라는 생각을 담은 창작물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론도 있다. 남주인공이 운동권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는 내용은 없다는 게 주요 골자다. 카톨릭대 기경량 국사학 교수는 “‘설강화’에서 운동권은 시대 분위기를 내는 소재 정도로 가볍게 사용되고 있으며 이를 비웃거나 폄훼하진 않는다”고 평했다. 제작진 역시 “극 중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간첩은 등장하지 않으며, 주인공들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끄는 설정은 지난 1·2회에도, 이후 대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인물과 설정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타당한가
‘설강화’ 속 안기부 대공수사1국 팀장 이강무(장승조). JTBC

조현탁 감독은 방영 전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극중) 인물과 설정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편 앞머리에도 “본 드라마는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기관, 기업, 지명, 사건, 배경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자막을 넣어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모양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제작진 설명대로 간첩(임수호)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내용은 없지만, 제작진 의도가 오해받을 여지는 많다”고 짚었다. 임수호가 베를린 출신 명문대 대학원생 신분을 위장했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온라인에선 이런 설정이 동백림 간첩 조작 사건(1967년 독일·프랑스 교민과 유학생 200여 명이 옛 동독의 베를린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였다며 처벌당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주장이 줄을 이었다. 공 평론가는 “초기 시놉시스를 보면 주인공 이름을 실존 인물과 같은 영초로 짓는 등 실제 역사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면서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는 설정 때문에 제작진의 의도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여지가 크다. 두 주인공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는 데 집중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짚었다.

작품이 민주화 운동을 ‘소품’처럼 사용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석희 대중문화 평론가는 “‘설강화’는 시대 배경을 벽지처럼 가져와 발랐다”고 했다. 군사정권 피해자가 실존하고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상황에서, 민주화 열망이 뜨거웠던 1980년대를 편의적으로 소환했다는 지적이다. 정 평론가는 “작품에 오류가 너무 많아 일일이 꼽기가 어려울 정도”라면서 “2회에서 호수여대 기숙사 사감 피승희(윤세아)가 간첩을 뒤쫓아 온 안기부 요원들에게 호통을 치지만, 당시 기숙사 사감들은 대부분 어용인사였다. 안기부에 영장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짚었다. 민주화 운동을 끌어오면서도, 당시 시대 상황을 실제와 다르게 표현한 것이 ‘설강화’의 패착이라고 정 평론가는 진단했다. 그는 “국가폭력 피해자, 군사정권의 공포를 경험한 이들이 이런 장면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며 “피해자를 향한 사과와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설강화’ 속 설정을 허구로 이해하라는 건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했다.


“역사왜곡 드라마는 폐지돼야 한다”라는 주장은 타당한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설강화’ 방영을 중지 청원. 35만 명 이상이 동의했다.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지난 20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설강화’ 방영을 중지해달라는 국민 청원이 올라왔다. “민주화 운동 가치를 훼손하는 드라마 방영은 당연히 중지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의 청원글은 추천수 35만(28일 기준)을 넘으며 정부 답변 대기 목록에 올랐다. 청년 시민단체 세계시민선언은 지난 22일 법원에 ‘설강화’ 상영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일부 기업은 시청자 항의를 받아 드라마 제작 지원을 취소하기도 했다.

‘설강화’ 폐지를 주장하는 측은 역사를 왜곡한 문제 있는 드라마가 더 이상 방영되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피해자들이 실존하는 현실에서 작품이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안기부를 미화하는 등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는 판단이다. 디즈니+를 통해 전 세계로 잘못된 역사가 알려지는 것 역시 우려하는 점이다. 비판 받는 상황에서도 역사왜곡 드라마 방영을 이어가는 JTBC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JTBC 폐국을 청원하는 글은 게시 5일 만에 약 4만명의 추천을 받았다.

‘설강화’ 논란이 폐지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반응도 나왔다. ‘설강화’의 설정과 완성도가 비판 받기에 충분하지만, 그것과 드라마 폐지는 다른 문제라는 얘기다. 만약 ‘설강화’가 폐지되면 앞으로 1980년대 안기부와 민주화 운동을 다루는 작품이 나오기 어려울 거란 지적도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작품에 대한 비판은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유해한 콘텐츠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지하기 어렵다”라고 했다. 정 평론가는 지난 3월 역사왜곡 논란 끝에 방송 2회 만에 폐지된 SBS ‘조선구마사’를 언급하며 “‘설강화’ 폐지 얘기가 나온 것엔 ‘조선구마사’ 영향도 있다”며 “이런 사례가 전례로 남아서 잘못하면 드라마가 폐지될 수 있다는 흐름이 이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은호 김예슬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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